대담 기록 : 탄 타오 (Thanh Thao) / 12기 진료단 (2011년)

by 평연 posted Jul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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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2011)탄타오시인대담사진.JPG

 

 

대담 기록

 

:: 일시 - 2011년 3월 24일 오후 8시 30분

:: 참여 - 탄타오, 통역 - 구수정 선생님

:: 기록 - 육수현

 

 

진료단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베트남 최고의 지성인 탄타오 시인과 베트남진료단 12기와의 만남을 시작하겠습니다. 탄타오 시인께서는 베트남 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셨구요. ‘풀밭위에 남긴 발자국으로 1979 베트남 작가상을 수상하셨고, 시집 태양의 파도로 베트남 최고 문인상을 수상하신, 베트남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리시는 분입니다.

베트남에서는 많이들 소개를 합니다. 꽝하이가 나은 시인, 그리고 밀라이가 나은 시인... 탄타오 시인이 쓰셨던 장편 시집중에는 밀라이에 아이들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를 보면, 폐허가 된 밀라이에서 폐허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베트남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 내용을 담은 시였습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가 처음에는 꽝하이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방문할때마다 늘 달려오셔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말씀 나눠주셨던 분이 탄타오 선생님입니다.

 

작년에 제주 문화예술단이 베트남 꽝하이에 방문을 했었는데, 그 당시 탄타오 선생님이 꽝하이성 문화예술위원회 주석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4~50명의 인원의 숙식과 공연장을 무료로 제공해주시고 성대하게 대접을 해주셨어요. 그때 탄타오 선생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베트남평화의료단이 처음 꽝하이를 왔을때는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었다. 우리를 감동시켰던 의사분들에게는 해주지 못했던게 안타까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주도 문화예술단이 탄타오 시인에게 감사말을 전했을 때 탄타오 시인은 당신들은 베트남평화의료단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이런 우정의 물고, 진정한 화해의 물고를 그들이 텄기 때문에 우리들이 당신들을 이렇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기억 속에 여러분들은 한 분 한 분 굉장히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지금부터 탄타오 시인과 베트남평화의료연대 12기 진료단과의 대화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탄타오 시인으로부터 간략한 인사말씀 듣겠습니다.

 

탄타오 :

제 가슴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여러분들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구수정의 통역을 통해 저에 대해 아주 열성적으로 소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거의 대시인으로, 엄청난 사람으로 소개시켜주신 것 같은데 저와 여러분은 아주 작은 평범한 사람이지요. 제가 예전에 어찌하면 나무만큼 클수 있을까, 어찌하면 사람만큼 작을 수 있을까라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작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약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초인도 아니고 로봇도 아닌 이상 인간은 그렇게 작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작을 때에만 비로소 인간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작은 세계에 작은 인간들이 참화나 고통을 만나게 되면 굉장히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는 게 인간입니다. 최근의 일본의 대 지진을 인간이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보시면 인간이 얼마나 침착하게 또 얼마나 용감하게 이겨내고 있는지 보실 수 있으십니다. 저희 베트남인민들도 이번 대재앙에 맞서는 일본인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갖고 찬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또 작은 인간이 대재앙 앞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런 인간의 비상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이런 참화를 원하진 않았을 겁니다. 저희 베트남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도 저희가 원한 것이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택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견뎌야 했었고, 그 안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비상한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일본은 쓰나미와 대지진 속에서도 굉장히 침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쓰나미도 지진도 없었던, 그리고 방사선이 중국으로 가지도 안았는데, 중국의 인민들은 심리적으로 큰 혼란과 동요를 보였지요. 이 와중에 정작 큰 참화 속에 있었던 그 수난을 견디고 있는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에 비해서 훨씬 더 침착한 대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대조적인 중국인과 일본인을 보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됐는데, 미국과의 전쟁중에 가장 치열했던 순간에, 하늘에서는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가하고, 육지에서도 포격을 가하고 총을 쏘는 가장 참옥했던 순간에 우리 인민들이 보였던 그 침착함에 대해서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아마도 전쟁의 정 중앙에 있었던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평범했던, 농민들 일상적인 사람들이 보였던 침착함이야말로 전쟁의 터널을 빠져나와서 승리를 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여러분들 밀라이박물관에 가셨으면, 아마 그 사진을 보셨을텐데요.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형이 동생을 구하려고 하는 사진을 보셨을 텐데요. 전쟁의 참화 속에 있을 때 우리 베트남 인민들이 그런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일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본인들의 침착함이 전쟁에서 우리 베트남 인민들이 보였던 침착함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는 꽝남성을 찾아와서 진료활동을 하시는데요, 진료하시면서 베트남 인민들을 만나면 알겠지만 전쟁 이후 4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힘들고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나라 사람보다 훨씬더 가난하고 힘겨울 수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베트남 인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있으시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셨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주 따뜻한 정감을 가진 베트남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그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오랜 시간 10년이 넘도록 베트남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10년을 계속 또 찾아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는 저희 인민들의 삶이 조금은 덜 힘들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만나고 있는 베트남이 지금은 매우 가난하고 초라하지만 여러분과 저희 베트남과의 만남 속에는 이런 차이가 없을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나는 하나하나의 인민들이 지금은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바로 이 사람들이 중국의 지배로부터 베트남을 지켜낸, 프랑스의 식민지 압제로부터 구출한 것이 바로 그 가난한 농부이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구해낸 사람도 바로 그 인민들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품성이 강하다고 우리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곳을 찾아주면 찾을수록 베트남의 평범한 인민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구요. 이렇게 평범한 인민과의 만남속에 진정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더 긴밀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 국가 차원의 교류가 아니라 바로 이런 만남 속에서 훨씬 더 긴밀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화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 편안하게 저에게 궁금한 점을 이야기해주셔도 좋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다른 두 민족이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편안한 음성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베트남어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탄타오 시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에 관한 혹은 개인적인 인생 공부 이런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베트남에 대 시인으로서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저희들에게 들려줄만한 산경험들이 있을텐데 저희에게 들려주시겠습니까?

 

탄타오 :

제가 올해 나이가 65세인데, 인생을 살아오면서 크지는 않지만 작은 경험이 쌓이는 나이인 것 같습니다. 저희 세대는 또 특별히 전쟁을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들에게 해줄만한 경험이 없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크지는 않지만 작은 얘기를 하나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한테는 호치민루트(베트남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길)를 같이 걸었던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벌써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몇 달전에 하노이에 있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써 있었습니다. 제가 썼던 시의 한 구절을 보고, 그 구절은 그때 같이 호치민루트를 걸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 이야기를 보고 그 사람이 이 친구가 바로 내 친구이다 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원래 그 친구는 약사였는데, 그때 쯤 호치민 루트를 걷다가 미군의 폭격에 맞아서 전사를 했다, 그것이 1971년 일이었으니까 정확히 올해로 40년이 됐다. 그런데 40년동안 나만 그 친구를 기억했던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다른 친구들이 40년 동안 그 친구를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주 놀라웠다. 내가 나와 호치민 루트를 걸었던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시를 썼고, 내 시에 구체적으로 그 친구를 밝히지 않았는데, 하노이의 어딘가에서는 그 시를 보면서 그 시의 주인공이 자신의 친구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제가 하노이에서 저에게 편지를 보냈던 여성을 보면서 굉장히 놀라웠던 것은 이미 죽은 지 40년이 된 친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다. 제가 썼던 시 구절 중 그 친구는 늘 항상 자기 친구들을 도왔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표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소리였지만, 하노이의 친구들은 그 친구의 그런 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질문) 꽝하이성 출신이신데 어떻게 하노이대학으로 가게 되신 것인지?

 

탄타오 :

나는 여덟살 때 하노이로 갔어요. 그 때는 1954년에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제네바협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 북을 위해 싸운 사람은 북쪽으로 집결하고, 남쪽을 위해 싸운 사람은 남쪽으로 집결했다. 바로 그 시점에 저는 북의 편에 섰던 가족이기 때문에 북쪽으로 가게 됐다. 여러분들도 분단세대이지요. 저도 그런 분단세대입니다. 저는 8살에 북으로 가서 20년 동안 분단된 세상을 살았지요.

 

(질문) 책으로만 볼 수 있었던 시인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시인은 필명을 주로 쓰는데, 왜 필명이 탄타오인지? 또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탄타오 :

물론 베트남에도 오랜 시절 자기 본명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 시인들이 필명을 쓰는데, 예를 들어 베트남의 유명한 시인인데, 찌랜빈은 본명이 잘 기억하기 어려운데, 필명으로 유명해진 이런 시인같은 경우 본명이 기억이 안날 정도로 필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죠. 나의 본명은 호, 탄봉(호성봉)입니다. 탄타오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내 필명을 들으면 탄이라는 것이 푸르다는 뜻이고, 타오라고 하는 것이 풀 초자이기 때문에, 푸르른 풀을 연상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처음 필명을 생각할 때는 그 음율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지, 딱히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질문) 제가 최근에 탄타오 시인이 어딘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변하신 것을 본적이 있는데요. ‘시를 위해 죽을수는 없다. 그렇지만 시가 사람을 구할 수는 있다라는 말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탄타오 :

어떤 시인들이 이렇게 말을 자주 하더라고요. 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아주 자주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항상 그들에게 말합니다. ‘시가 그대를 살리는 게 아니냐. 시가 당신을 밥먹여주고, 시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고 하는 것을 보면 시가 당신을 살리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처음 시를 쓰게 될 때 아주 어려서, 내 시가 어때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시가 좋아서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서 풀고 싶어서 시를 썼던 것 같구요. 제가 본격적으로 시를 알겠다. 시를 쓴다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 조국에 전쟁이 닥쳐 왔어요. 그러면서 내 시의 방향이 결정이 됐지요. 아마 저는 전쟁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나는 애국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를 써왔던 것 같습니다.

 

(질문) 2007년도에 베트남에 방문했을 때, 빈딩성으로 갔었습니다. 저희가 그때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같은 경우 일본의 지배를 받고 지금까지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 인민들은 왜 한국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느냐고 한 친구에게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의 대답이 참 가슴아픈 이야기였습니다. 한 마디였는데요, ‘우리는 너무 가난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가난하기 때문에 정의와 진실이 외면되어서야 되겠느냐라는 말에 동의를 했었는데, 그 다음날 베트남에 온 다른 선생님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하자, 그 분은 당신의 눈으로 보지 말고, 베트남 사람의 눈으로 바라봐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탄타오 :

저는 그 학생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베트남 아직 가난하잖아요 라는 말이 베트남의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속에 전혀 진실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베트남이 가난하기도 하고 그리고 가난해서 아직은 베트남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저는 솔직히 생각합니다. 베트남 인민들은 여러분들과 다른 시스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나서서 한국정부에 사과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과 다른 시스템에서 살아온, 이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우리 정부가 사과를 요구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보기에는 아직까지는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에 이러한 사과를 요청한적이 없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베트남 여전히 가난하지만, 베트남이 베트남에 잘못을 자행했던 나라들에게 사과를 요청하는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베트남 사람들이 정당한 우리의 권리로서 사과를 받아내야한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10여년동안 베트남을 찾아주는 행동이 바로 간접적으로 우리 인민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저지를 잘못이 아니고, 제가 한국 작곡가를 만났었는데, 그 작곡가가 미안해요 베트남이란 노래를 들려줬는데, 그 작곡가 역시도 자신이 스스로 베트남 인민들에게 털끗만한 잘못도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때때로 잘못을 스스로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게 하는, 역사는 때때로 여러분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훨씬더 극명하게 보일 것 같은데, 정말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인민들이 그렇게 모두가 다 자신을 희생해서 그런 상황을 대처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만 자기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고 보시는지?

 

탄타오 :

베트남 전쟁시기에도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베트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 대답도 분명한데, 남을 위해,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람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질문) 젊은시절에 존경했던 위인, 사람들이 있다면 누가 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탄타오 :

저 같은 경우는, 우리가 젊을 때 보면 이상형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던가 하는 것이 있는데, 이건 우상과는 좀 다른데, 저 같은 경우는 좀 낭만적이고 추상적이기도하고 이상적이기도 한 내 인생의 모델들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 보통 보면 위대한 위인들, 어떤 구체적인 인물 이런 사람을 보면서 내 이상향으로 삼고 간직하고 있는데, 저는 좀 달랐어요. 인생의 단계마다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달라고, 제가 추구하는 이상향들은 보통 실제하지 않거나 이름이 없거나 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냥 작가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나의 이상속의 작가를 그리는거죠. 아니면 내가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축구선수의 이미지를 내 이상형으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두고 분투를 했던 이런 것들이 있어요. 나는 구체적인 인물을 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나는 그렇게 해서 시인이 됐는데, 나는 내 인생에서 어떤 시인도 이상형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상으로 꿈꿨던, 작가라던지 아니면 축구선수라던지, 이런 걸 결국 이루지 못해서 맨 마지막에 내가 하게 된 게 시인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사회자)질문이 없으시면 마지막으로 탄타오 시인의 당부말씀을 듣고 이 순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탄타오 :

여러분들이 5000km를 날라서 베트남까지 오시는데, 여러분들이 어떤 맘으로 여기와서 뭘 하려고 이렇게 먼 길을 달려오는지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먼길을 달려와서 여러분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 왜 하필 중부의 가난한 지역인지 그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어떤 당부의 말을 한다는 것은 참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맘인지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어떤 당부의 말을 할 이유가 없는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우리 인민들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에, 여러분들도 저희 인민들에게 진심어린 마음의 보답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구요. 여러분들이 우리 인민들에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 인민들도 여러분들로부터 이미 깊은 위안을 받고 있을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전히 가난한 우리 인민들, 굉장히 몸에 많은 병들을 가지고 있을거예요. 그렇지만 이 많은 병들이 여러분들을 만나는 순간 굉장히 가벼워지고, 여러분들의 위안 속에서 한 결 가벼워질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