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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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베트남 북부 닌빈성 Tinh Ninh Binh 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Le Tri Thuy(레 치 투이)이다. 1966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7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여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197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 대항해 싸웠다. 1976년 ‘문예주간’ 시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전선에서 죽어간 친구 ‘Van Le’의 이름으로 시를 발표했다. Van Le는 22권의 시집과 10권의 소설집을 냈고, 20여편이 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1996년 영화 ‘조용한 영광’으로 베트남영화제 최우수 시나리오상, 2000년 다큐멘터리 ‘원혼의 유언’으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대부분 전쟁의 상흔에 대한 내용들이다. 한국에서는 하재홍의 번역으로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이 출간되어 있다.

「평연」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Van Le와의 대담을 기획했다.

 

 

대담 기록

 

:: 일시 - 2005년 3월 13일 오후 3시 30분

:: 참여 - 반 레, 통역 - 구수정 선생님

:: 진행 - 임서영

:: 기록 - 박두남(비디오) / 김은희(서면)

 

 

인사말

 

내가 굉장히 사랑하는 내 강토에서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친구로 불러도 좋겠습니까? 내가 매번 한국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감격스러움이 있었지만 올해 특히 더 감격스러운 것은 올해가 베트남 종전 30주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찬란한 3월에 여러분을 만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만남에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오늘의 만남이 우정의 통첩이고 오늘은 세계평화의 통첩을 날리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나는 오늘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30년 살아왔던 그 감격을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1

17살이면 굉장히 어린 나이인데. 그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자원 입대했는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었는가? 물론 후회는 없겠지만 그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반레 :

북부 베트남에 살고 있던 17살은 이랬습니다. 학교에 갔지만 정상적인 수업은 없었습니다. 17살이란 나이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을 겪었는지만 돌아보면 17살이란 여러분의 17살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7살만이 가질 수 있는 마주 맑고 낭만적인 사랑도 있었고 천민난만한 꿈도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좀 다른 것은 내가 가진 특수한 시대의 17살 삶은 항상 굶주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에 200그람 정도의 낱알을 먹을 수 있었고 나머지 허기는 물이나 풀, 운이 좋다면 감자 등으로 허기를 채우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수업이 잘 이뤄지지 않았지만 항상 공부에 대한 욕구가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하교 이후에 늘 무엇인가, 소에게 풀을 먹이는 등 어떻게 가족을 도울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항상 했었습니다.

여러분은 다행이 이런 경험이 없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학교 가는 길에는 항상 미군의 비행기가 날고 있었고 학교가 폭격에 부서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을 명확히 기억합니다. 196485, 통킹만 사건이라고 이름지어진, 미국의 북폭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비행기 소리에 감각을 열어놓고 있었고 소리만으로 비행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초등, 중등의 시절을 지나왔는데 내가 아마 17살 즘 되었을 때 깨달았던 것은 우리 조국이 침범 당했구나 우리 민족이 '침해당하고 있구나. , 그 안에 내가 있구나.' 그걸 깨달으면서 다행히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엇인가였습니다.

북부의 그 나이 아이들은 그러면서 당연히 지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어떤 일말의 갈등이 없었던 것이, 내 주변의 누구나가 자원을 했기 때문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사람은 자원이었습니다.

17살 머리 속에 사실 자원을 하며, 내 머리 속에 계급투쟁이란 개념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없었던 거 같습니다. 명확한 단어로서의 개념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나간다는 것, 사상무장 없이 나갈 수 없습니다. '민족해방'이라는 생각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계급투쟁이란 명확한 생각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17살이지만, 전쟁에 나가면서 가슴이 뿌듯했던 것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 때문에 베트남의 해방뿐만 아니라 미제국의 핏박 속에 있는 다른 민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자부심이 명확히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체 게바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아마 여러분들이 체 게바라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어쩌면 그 당시 내게도 똑같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내가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내려올 때 체 게바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들 그 당시 호치민 대장정에서 모두 부등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 첫번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이었습니다.

 

질문2

전쟁을 하며 가해자들에 대한 사적 감정(미움)이 있었을 거 같습니다. 그런 미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용서하게 되었는지요?

 

반레 :

북부와 남부 사람들의 경우 실질적으로 증오의 감정이 다릅니다. 북부는 폭격을 받았을 뿐이지 증오의 실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부는 직접 실체를 보고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감정이 다릅니다. 전쟁이 끝나고, 개개인의 감정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정리를 한 것 같습니다. "복수심이 결코 인간을 키울 수 없다." 전쟁 당시에 증오는 전쟁의 수레를 돌리는데 일조를 하지만 끝나고 나서는 대다수 베트남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복수심이 인간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평화의 시기에는 우리의 적은 누굴까란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어떤 친구와 오래 놀 수 있을까" 그게 전쟁이 남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베트남을 둘러보다 보면 어떤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만큼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가 별로 없습니다. 실제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의 맘속의 자기 만의 종교를 갖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도 끌어안고 수용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베트남은 그것이 전쟁일지라도 많은 것을 용납하고 끌어 앉습니다.

멀리 과거의 역사를 보지 않아도, 가까이 역사를 보더라도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한국, 호주며 중국 등 적을 다 뽑아 놓으면 베트남은 친구가 없습니다. 누구랑 노는가? 이게 베트남의 현실입니다.

베트남의 기질이나 역사 전통적인 측면으로 보더라도 증오나 복수심을 길게 갖고 그것을 가지고 키우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질문3

같은 맥락이지만 17살 과거의 한국에 대한 생각과 현재의 한국에 대한 감정, 그리고 베트남평화의료연대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가요?

 

반레 :

우리 부대가 북에서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남부로 와서 싸웠습니다. 우리 부대의 가장 큰 행운은 한국군과 마주치지 않은 것이죠. 만약 마주했다면 죽도록 싸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솔직히 얘기를 하면 전쟁의 시기에 한국군을 증오했고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한국사람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이 땅에 한국군이 들어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민에게 이유 없는(경험 없이도)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은 엄청난 증오심을 한국군에게 가졌었습니다.

전쟁 당시 우리 같은 경우에 한국군 포로 하나 잡은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군포로나 등을 잡은 기억은 있지만 한국포로는 잡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19전선에서 2명의 한국군 포로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한 한국 포로는 결박해서 끌려가는 것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폭격이 떨어져 끌고 가려던 베트콩과 거부하던 한국군 포로 둘 다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포로 한 명은 순순히 따라왔는데 나중에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북으로 보내줬다. 그리고 한국군 중에서 유일한 경우였는데 싸이공에서 74년 차를 몰고 북으로 올라가 베트콩에 합류했던 사람이 있었는데(94년 구수정 씨 확인 이름 류남선 씨 베트남에서 외롭게 죽음) 나는 그 분과 20여분의 대화를 나눴는데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의 그분의 심정은 어떤 전쟁의 피곤함과 깊은 슬픔에 싸여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우리 몸에 비록 서로 적으로 군복을 입고 있지만 벗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 인간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근데 우리가 출발은 전쟁부터 하였습니다만 나의 개인적인 출발은 전쟁이 아니고 전쟁 이전에 나는 한국에 대해 굉장히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우리는 친구로서 굉장히 아름다운 만남을 가졌던 민족입니다. 아마 나는 지금으로부터 5-6백년 전에 중국의 사신으로 갔던 베트남사신과 조선의 사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친교를 나눴는지 그때 서로 나누었던 서신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홍계희라고 하는 대유학자가 있잖아요? 아시죠? 베트남의 유명한 ***라는 학자가 있는데. 한국의 학자가 이 사람에게 친교의 부채를 보내오는데 이 부채를 받고 ***가 지은 시가 있는데 "동토의 바람이 이 안남에 불어오는구나." 라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답시라고 하죠? 한국 이수광(실학자)과 베트남의 실학자가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입안에 굴리고 굴려 읊조렸더니 입안 가득 안남의 향기가 머문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관계에 어둠이 드리웠던 게 박정희 병사들이 들어와서입니다. 이 박정희 병사들이 이 땅에서 벌였던 전쟁들이 실로 무거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드리웠던 한국에 대한 무거웠던 것이 지워지지 않고 오래 갔는데 아마 내가 한국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은 여러분들을 만나고부터 입니다. 이건 나 혼자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베트남사람들이 그랬을 텐데. 난 놀라웠습니다. 여러분은 전쟁의 주체도 당사자도 아닌데 그리고 아무도 여러분에게 부채를 짊어지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채라고 하며 왔을 때 놀라웠고 당혹스러웠고 감동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이 여러분의 노력에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언론 등을 통해 여러분을 접한 많은 베트남 사람들 또한 그렇게 느꼈습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여러분이 스스로 한 노력들은 베트남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난 지금도 건치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그때 신동근 선생님이 단장으로 왔었죠. 내 너무 친한 친구 노은희, 전창권 선생님 등을 만나고 나서 내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곳에 보냈을까?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이 커다란 명분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사람 가슴 깊은 곳의 슬픔, 미안함이었겠다 라는 생각을 결론적으로 했습니다. 이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이 여기 왔던 건 그 사람 개개인이 가졌던 어떤 아픔과 슬픔이었겠구나.

근데 여러분이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데,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이 작은 내 친구들이 왜 저렇게 큰짐을 짊어지려고 했을까. 어떤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존경을 전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작은 몸으로 지려고 했던 그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작았던 내 친구들이 이제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맨처음 난 여러분이 1회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해를 거듭하며 나에게 더 큰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고 신뢰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해마다 커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선의의 맘으로 오지만 베트남, 참 힘들거든요. 베트남이 여러분을 얼마나 힘들게 할 지 잘 알고있습니다.

 

질문 4

저는 김성수라고 합니다. 이렇게 선생님을 뵙게 되어 기쁘고 친구가 되어 더욱 기쁩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했는데 꼭 읽어보겠습니다. (반레 아저씨의 답 : , 지금 나 너무 실망스러워요. 웃음) 1) 베트남 인민을 억압했던 미국, 한국 등이 지금 돈을 갖고 들어오는데 거기서 받는 느낌이 무엇인지? 2) 지금의 학생들에게 전쟁에 대해 말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반레 :

무기만 들고 있지 않다면 어떤 친구들이던 일단은 반기고 봐야지요. , 돈을 가져와 뿌려주면 그것도 좋아할 일이지요. 근데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친구는 실과 바늘을 가져와 꼬매주고 또 뺀찌를 들고 와서 뽑아주는 그런 친구들, 그 친구들을 더욱 좋아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확실히 할 말은 내 조국이 가난해도 부족해도 내 조국을 가졌다는 것이 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통일은 여러분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한 민족이 갈라서 살 수 없습니다. 꼭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 조국의 전쟁이 끝나고 내 첫기억은 남에 있는 사람이 북에 가서 가족을 찾았고 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내게는 추억인데 한국의 이산가족 모습을 보면 그때 장면이 떠오르며, 대부분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의 통일을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통일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베트남 남자가 북한여성을 사랑하였는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해 결국 둘은 30년 동안 기다려 결혼을 했는데 백발이 성성했습니다. 이들은 자식이 없겠지만 이들은 아이보다 소중한 것을 얻었겠구다. 오랫동안 갈망하는 거, 오랫동안 기다린 것, 오래된 것의 소중함. 그래서 한반도의 통일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문5

저는 여기 오기 전에 베트남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오게 되며 여러 가지 서적을 읽게 되면서 베트남에 부러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호치민이라는 근대사의 영웅과 통일을 이뤘다는 점이었습니다. 근데, 우리 나라는 현재 전쟁중입니다. 북한의 핵문제가 그렇고... 우리는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 끼어있는데 그래서 이라크 파병 등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의 생존 전략이랄까 등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비슷한 처지의 역사를 거쳐왔던 경험에서 조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치과의사 현용휴라고 합니다.

 

반레 :

내가요, 국가의 생존전략을 연구하는 정객이 아니어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의 생존전략은 한국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가질문

밖에서 보면 잘 보이잖아요. 문제가?

 

베트남이 전승을 했지만 기이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모든 게 다 하찮아 보이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생각해왔는데 또 하나는 내가 옳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옳은 것도 싫고 나만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정의이고. 근데 다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 국가가 내가 이런 도취에 빠져있을 때, 내가 전승의 기쁨에서 깨보니 여러 국가들 베트남 보다 빨리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어떤 고민을 하고 있든 간에 전승의 기쁨 속에 도취되어 있는 것보다 올바를 겁니다. 내가 통일해라, 통일해라 말했지만 실지로 통일이라는 것은 영토의 통일보다 민족의 통일이 훨씬 더 어려울 거라는 겁니다. 한 가족이 통일되는 것, 형은 베트콩 아우는 베트남 이런 가족은 베트남 안에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절대 될 거 같지 않았던 통합이 가족, 민족이 오랜 시간 노력하고 나니 되더군요.

우리 한 집에 동생이 싸이공 남부를 따르고 형은 베트콩을 따르던 집에 형이 왈 "내가 어디를 따르던 네가 그렇게 원하면 내가 널 형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진정 네가 가는 길 안에 좋은 일을 하고 민을 위하고 끝까지 간다면 나중에 나는 네가 나를 형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겠다." 이 형제의 대화가 시사하는 부분은 서로 다른 길을 가도 자신이 옳다고 가는 길을 서로 싸우면서 가도 정말 옳은 길을 간다면 종국에는 같은 길을 갈 것이다. 일단 그 길을 가라.

베트남은 형제조차도 늘 이념을 가지고 싸웠어요. 그러나, 누구나 서로가 진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고 간다면 일단 믿어보자. 그러나 정말 종국까지 네가, 네가 가는 길에서 옳고 끝까지 간다면 인정해줄 거고 결국 만날 것이라는 거죠.

 

질문 6

저는 한의사가 아니고 좋은 한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손해림이다. 제가 일어난 이유는 6시간이나 멀리 와서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유명한 분을 만나니 그냥 가기 섭하여 한마디라도 해야 될 거 같아서 일어셨습니다.

 

반레 : 그러면 이왕 일어났으니 크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

손해림 : 제가 미처 준비를 못해서 질문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겠고 제가 시를 좋아하고 또 생각지 못하게 선생님의 말씀이 시적이어서 가지고 다니던 시를 하나 낭독하겠습니다.

반레 : 저한테 들려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말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방문객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 정도만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유익한 일을 해라. 우선 나 자신의 평화를 이루고 그 평화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줘라. 내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 7

내가 베트남에 대해 접하게 된 건 30년 전인데. 내가 70년대 초에 대학에 다닐 때, 제 형이 베트남 전에 참전을 했습니다. 다녀와서 자살기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참 형이 어려운 시간을 지나 왔겠구나, 했었습니다. 저는 치과의사 이강주 입니다. 근데 반레 선생님께서는 전시에 적군을 향해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지요?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를 가진 위대한 민족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치과의술을 가지고 와서 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전해드리길 부탁드립니다.

 

반레 :

우리 그 당시에 나는 직접 총칼을 들고 싸왔습니다. 다만 그건 구별할 수 없었어요. 쓰러지는 적들이 내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지, 다른 사람의 총탄으로 쓰러지는지. 근데 나는 어쨌든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봤습니다. 확실히 봤습니다. 내가 군인이었을 때 나는 내 앞에 적을 확실히 적중시킬 수 있는 군인이 되고 싶었고 실제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미군의 장갑차를 정확히 명중시킨 적이 있는데 그 이후는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때는 적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다가 명중시킨 후에 바로 빠져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 당시 우리가 가진 무기란 게 멀리 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명중시킨 어떤 것이나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이, 내 친구가 "니 놈이 결국 명중시켰구나. 미국놈의 장갑차를 결국 명중시켰구나." 그래서 결국 내가 미군의 장갑차를 명중시켰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고요. 아마, 당신의 형님께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이게 굉장히 솔직한 마음인 거 같습니다.

 

질문 8

영화감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여. 베트남 전에 관한 허리우드 영화를 보며 느끼는 솔직한 감정은 어떠한 가요? (김용주)

 

반레 :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허리우드 얘들이 영화를 진짜 못 만든다는 거죠. (웃음) 그리고 철저히 자신들의 관점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베트남에 재능이 있는 감독들이 있는데 모스크바 영화제 감독상 "불타는 들판"을 만들었죠. 이 영화를 가지고 미국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감독들이 왈 " 당신이 그린 미국은 우리랑 하나도 안 닮았다." 그러자 감독 왈 "그럼 너희들은 우리 공산군을 참 잘도 똑같이 그렸다." 이렇게 한마디 해줬다고 하네요. "너희들이 그린 공산군은 작고 못생기고 새까맣고 이상한, 돌아버린 그런 사람으로 너희들은 그렸잖아."

돌아와서 우리가 전쟁을 그리려면 좀더 엄숙히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제 친구와 저는 결론을 서로를 그것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적을 괴물로 그리는 그런 어린 짓은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군복을 벗겨놓으면 그속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잊지말자 라고 했습니다. 미국은 사실 아까는 농담한 것이고 미국은 진짜, 동적인 영화, 동적인 영상을 진짜 잘 만듭니다. 그들이 그런 강한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은 스스로가 협객이었으면 좋겠고 우리 혁명군을 그들 협객으로서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영화 속의 혁명군들은 어리숙하게, 어리석게 그리는데 그러면 그들에게 또한 득이 되질 않습니다. 오죽하면 그들은 어리숙한 우리에게 졌지 않았습니까.

아시아의 사람들이 아시아의 영활 만들었으면 좋겠고 아시아의 사람, 정서를, 젊음을 이러한 것을 만들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고 그것보다 좀더 근본적인 거 이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가져야할 어떤 것을 만드는 준비를 해야 하고 그것이 영화인들이 가져야 할 엄숙함입니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 동방의 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중국의 영화, 일본의 영화가 그 첫걸음은 가져가고 있다고 보고 저 역시도 한국의 영화를 즐겨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인사

 

여러분들과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있어서 무척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를 말하고 싶은데 건강했으면 하고 영원토록 행복했으면 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내 안부와 제 행복에 대한 기억을 전하여 줬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뜨거운 신념과 맘을 가진 사람이고 여러분들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계실 것이고 여러분들이 여기서 하신 일들이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1. 대담 기록 : 반 레 (Van Le) / 7기 진료단 (2006년)

  2. 생존자 만남 기록 : 빈딘성 (Binh Dinh), 따이선현 (Tây Sơn) / 7기 진료단 (2006년)

  3. 대담 기록 : 탄 타오 (Thanh Thao) / 12기 진료단 (2011년)

  4. 대담 기록 : 반 레 (Van Le) / 6기 진료단 (2005년)

  5. No Image 09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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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미마을 응우웬 티 탄 아주머니와 뚜이엔(다낭외대 한국어학과 교수)와의 간담회 / 20기 진료단 (2019년)

  6. 퐁니마을 위령비 참배 및 응우웬 티 탄 아주머니와의 간담회 / 20기 진료단 (2019년)

  7. Duy Xuyên (유이쑤옌) 현 통합 위령관 및 생존자 만남 / 20기 진료단 (2019년)

  8. No Image 30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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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자(유가족) 만남 기록 : 꽝남성 하미마을 고 팜티호아 Phạm Thị Hoa 할머니 유가족 / 19기 진료단 (2018년)

  9. 강연 기록 : 3578km, 추모와 기념 사이 - 베트남의 전쟁 기억과 한국의 전쟁 기념(강연자 : 구수정) / 19기 진료단 (2018년)

  10. 생존자 만남 기록 : 꽝남성 (Tinh Quang Nam), 디엔반현 (Huyen Dien Ban), 디엔안사 (Xa Dien Tho), 퐁니촌 (Thon Phong Nhi),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 / 18기 진료단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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