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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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반레 아저씨로 불리는 선생님은 본명이 Le Tri Thuy(레 치 투이)이고 반레라는 이름은 친구의 이름입니다. 베트남전 당시 호치민 루트를 타고 싸이공까지 올 때 그 2/3가 죽었습니다. 첫 번째는 굶어죽고 두 번째는 폭격에 의해 죽고 세 번째는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반레라는 친구분은 그 와중에 조명탄이 터지면 다른 사람들은 숨는데, 막 달려나가서 조명탄 쪽으로 달려가 시집을 읽었던, 낮에는 행군하느라 책을 읽을 수가 없으니까, 시인의 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죽고 반레 아저씨는 그 친구분의 이름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위령제에서 불리웠던 노래가 너무 끔찍하여 여러분께 그 가사에 대해 소개하지 않았는데 그 얘기를 들으신 반레 감독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귀를 막고 듣지 않아도 노래는 불려지고 있어.' 그래서 제가 그 노래에 대해 여러분께 소개할까 합니다. 이 노래는 '빈한의 한'이란 제목으로 빈한은 따이빈사의 옛이름입니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호앙 목 언으로 빈딘성 민족해방문예단(이후 빈딘성 민족 가극단)의 소식된 분이고 작곡은 ***** 항미 전쟁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노래는 베트남 남부지방 전통 마당극의 노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

떨리는 마음으로 부릅니다.

 

 

대담 기록

 

:: 일시 - 2006년 3월 3일 

:: 참여 - 반 레, 통역 - 구수정 선생님

:: 진행 - 임서영

:: 기록 - 박두남(비디오) / 김은희(서면)

 

 

인사말

 

해마다 늘 만나왔지만 올해 다시 만나는 것이 감격스러운 그 이유가 여기까지 와서 위령제에 참여하고 진료하는 때문인 듯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있던 슬픈 과거를 지우고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건강의 인사를 보냅니다.

베트남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편히 지내고 가길 바랍니다. 저는 베트남전 당시 군인으로 싸웠습니다. 저에게 질문하여 주시고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은 다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건강하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트남 여자를 울지 않는 어머니라 하는데 반레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떠셨는지요?

 

반레 :

사실 세상의 어머니가 같을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전장에 보내는 말못할 가슴 아픔이 같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도 같으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배웅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굳건한 모습이었는데 나중에 돌아와 들으니 저를 보내고 며칠을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놈의 원숭이 새끼야, 넌 어떻게 그날 웃으며 떠났니?" 그랬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어머님이 내가 웃으며 떠나서 당신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난 '억지로 웃었어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그랬어요.' 우린 서로 오해하고 있었는데 서로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었어요. 동생들이 어려서 이 어린 동생들이 어머니를 전혀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더욱 가슴이 더 아팠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웃들은 내게 축하를 해줬습니다. 뭐라고 축하해줬냐면 '이제 넌 배 골지는 않겠다.' 왜냐면 그 당시에 우리는 너무나 가난해서 며칠씩 굶기도 했어요. '비12'라는 약이 있는데, 제가 전쟁 끝나며 너무나 간절하게 어머님께 선물을 가져다 드리고 싶었는데 뭘 가져다 드려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이 약을 선택했는데 왜냐면 그 때 가족 중에 어머님이 너무나 심하게 말라가고 있으셨어요. 그 약을 사들고 너무나 설레는 맘으로 어머님께 가져가자 약통을 보시고 한숨을 쉬셨어요. '이 약이 내 심장을 도와줄 수 있겠지만 우리의 굶주림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잖니.' 이것이 나의 어머님만의 일이 아니고 베트남의 어머니, 베트남 북부의 어머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자신만의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하는 일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이렇듯 어머님들은 슬픔을 머금고 전쟁기간 내내 그리고 이후를 살았습니다. 지금 베트남 언론은 이 부분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어요. 언론들은 어머님이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그것만큼 영광이 없었고 그런 행복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질문2

17살이면 굉장히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그 당시 항미 전쟁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말씀하여 주세요.

 

반레 :

제가 17살이었을 때는 이미 미군이 마을을 습격하는 때였습니다. 마을에는 내 위의 선배가 없었지요. 내 위에 선배들이 이미 전쟁터로 나간 상황이었어요. 전쟁이란 것은 전쟁의 감각이라 하는 것이 굉장히 낯설어요. 갑자기 폭격이 쏟아지면 거리의 사람들 논밭으로 다 뛰어 들어요. 그리고 논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다 뛰어 들어요. 그 감각이라는 것이 굉장이 혼란스럽고 엇갈리고 그래요.

전쟁의 초대장을 받아들고서 다들 서로 그것에 대해 숨겼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 저 자원해서 갑니다란 말씀을 안드렸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평소보다 밥을 많이 지으셨고 동생들이 그것에 대해 너무 너무 좋아했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어머님이 동생들에게 너희들 너무 많이 먹었으니 이것은 형을 위해 남겨두자고 하셨지요. 그것이 지금 제가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날 배웅하는 것이었고 가장 슬폈습니다. 실제 난 내가 전쟁에 자원하면서도 내가 참여해야 할 전쟁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 당시 전 전쟁을 알지 못했고 다만 폭격이 쏟아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해대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만이 나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해요. '너는 기억해라. 네가 어디에 가던지 어떤 곳에 있던지 인민들이 너의 갑옷이 되어 줄 것이다.' 하시며 제게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것이 삼국지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환란의 시기에 태어나서 칼을 잡으면 공을 세우게 된다.' 그 당시 베트남의 아버지들이 전쟁에 나가는 자식들에게 이런 비슷한 말을 해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전쟁에 나갈 때 내 준비는 이 정도였어요. 답이 되었나요?

 

 

 

질문3

사실 우리가 얘기는 들었어도 전쟁에 대해 알지 못하니, 전쟁이 어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반레 :

대담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북에서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는 데 6개월이 걸렸습니다. 호치민 루트를 걸어올 때 보급된 것이 쌀인데, 가루를 만든 것이었어요. 이게 굉장히 희고 가루로 날리는 것이었는데 하루에 2량(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는데), 약 2량 반 정도의 분량을 공급받았어요. 아마 정글에 있는 그 많은 풀들은 다 핣았을 거에요. 그래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먹으려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오면서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죽어갔어요.

너무 이상했던 것이 나와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푹 쓰러져 죽는 거에요. 그래서 그 원인을 알기 위해 군의관들이 해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칼날을 가지고 배를 가르는 것을 보고 피가 이런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런 선홍빛이라는 걸. 위에는 풀밖에 없었습니다. 심장이 그렇게 큰 것인지 몰랐는데 베트남 자롱만했어요. 그 심장을 쟁반 같은 것에 놓으니 납작하게 넓게 퍼져 가라앉았어요. 그 부검의 결론은 아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사력을 다해 걸으며, 기며 남부 베트남에 도착했습니다.

전쟁이란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내가 전쟁에 맞닥뜨려 느낀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나갔던 전선이 19번 도로,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면 빈딩성에서 따이빈사 들어가는 그 길이거든요. 그 19번 도로변에 꼬투리라고 하나, 거기에 아케전투, 아케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미군이 들어와 마주쳤어요.

제가 설명하면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헬기 하나 하나에 자동다연발 총이 장착이 되는데 자동다연발 총이라는 것은 1분에 5천발이 한꺼번에 발사되는데, 숲이 순식간에 낫질한 것처럼 깍여 나갑니다. 미군 바로 옆에 있는 병사만 살아남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전략은 '미군 허리띠를 붙들고 싸우자'였습니다. 어떤 명령을 받았냐면 다른 부대를 찾아가서 전략을 들어오라, 그 때 다른 단위가 미군 D51기의 폭격을 직접 받게 되었어요. 그 당시 미군이 D51기로 폭격을 하면 어땠냐면은 5대, 6대가 동시에 떠서 한꺼번에 폭격을 퍼부었죠. 비행기 1대에 보통 30톤 정도의 폭탄을 실을 수 있었어요. 그 당시에 이 D51기 엔진 소리만 들으면 폭격이 있을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 엔진 소리를 듣고 바닥에 푹 엎드려서, 그래서 그 때 시작된 폭겨이 15분 가량 쏟아졌고 폭격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보니 앞의 숲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내가 내 앞의 숲이 사라진 순간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우린 너무 굶주려서, 내 자신이 너무 말라 있었거든요. 그래서 실제 미군을 맞딱드리면 미군을 상대로 내가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없었어요. 아마도 우린 그저 미군의 주변을 맴돌다가 살아나게 된 거 같아요.

그러다 실제 미군을 맞딱드린적이 있어요. 그들을 보며 실제 그들도 우리처럼 너무 어리고, 젊고 해맑은 청춘들인 거에요. 하루는 이 미군들이 자신들의 참호에서 나오더니 뻘밭에 갔어요. 그리고 진흙을 서로 던지며, 어린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고 하기에 저는 고기를 잡나 싶었어요. 그랬는데 그들이 시궁창에서 노래를 부르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들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거에요.

세상에 베트콩들은 물이 없어 풀잎을 핣아 먹고 사는데 그들에게는 헬기가 와서 물울 뿌려주었어요. 그 때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발가벗고 샤워를 하고 있는 이 젊은 미군들을 보며 내가 지금 이순간에 그들을 향해 총을 소면 이게 어떤 느낌일까, 굉장히 당혹스럽고 이런 게 바로 전쟁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거든요. 저들을 이곳에서 몰아내야 한다, 베트남에서 몰아내야 한다...허나, 그들에게 총을 쏘는 문제는 또 다른 것이었거든요. 그들에게 총을 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죽여야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였죠. 그래서 하루는 베트남 해방군의 아주 높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어깨를 이렇게 만질 때 느낌이 어떻습니까.  '나는 결국 이 아이들한테, 베트남 병사들한테 전장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데 그러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책에도 썼는데요, 내가 바로 앞의 적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적이 어디 있고 군인이 어디 있고 그렇습니까..전쟁 상황에서 적이지만 결국 그들도 사람이지요.

 

1968년 5월이죠. 그 때 싸이공에 진군해 오는 전투가 있었지요. 물론 거기까지 진군해오는 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그 때 느낌이 어땠냐 하면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죽겠구나, 내 예상이 맞았는데 딱 한 전투가 끝나고 나니 우리 총탄이 바닥이 났어요. 우리 길을 안내하던 여성 동지가 있었는데 그 당시 다리 부상을 입었었어요. 제가 얘기를 했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성 동지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된다.' 그래서 이 여성 동지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니까, 병원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구찌지역인데 거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그리고 건강한 우리 몇 사람, 몇사람이 남아서 미군들이 그들을 추격하는 것을 막기로 했어요. 우리는 이 길을 막고 있다가 5시 쯤 되서 약속했던 구찌 지역으로 갔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자 마자 '뀌만 병원에 갔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그 사람들의 답이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 작은 부상, 다리의 작은 부상 때문에 죽었다니..아마도 출혈 때문에 죽은 거 같아요. 제가 갔을 대 뀌만이라는 여성 동지가 알루미늄 판 같은 거에 눕혀져 있었어요. 이미 팔과 다리가 굳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90도 알콜을 가져오라고 동료들에게 말했고 저희는 알콜을 가지고 관절, 무릎과 팔 관절 등 딱딱해진 곳을 막 주물렀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결국은 그녀의 눈을 감기면서 제발 우리를 용서해 달라. 이렇게 어린 우리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신의 운명을 비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제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또 기도했죠.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어린 병사들, 우리를 지켜달라고...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어요. 제가 기도하는 동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나중에 어머니가 그렇세 말씀하셨어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그래요, 이럭 것들이 전쟁의 불행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원하는 것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도 열열이 강열히 희망하는 것은 여러분도 이런 전쟁을 겪지 않고 통일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저는 전쟁이란 것이 다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전쟁이 사람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면, 그리고 문화까지, 그리고 결국 인간의 체통, 인간까지 결국 인간까지 허물어뜨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질문4

전쟁의 상황을 들어보면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요? 베트남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지요? 제가 보기에는 희망을 가지고 계셨던 거 같거든요. 그 희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요?

 

반레 

그 때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오늘 나는 총에 안맞았다, 우리가 총에 안맞았다, 또 하루가 지나면 똑같이 총을 안맞았다...우리가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은 없고 솔직히, 언젠가 이 전쟁에서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1968년, 1969년은 선생님이 직접 전쟁에 참가한 그때는 베트콩이 엄청 밀리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변경지대까지 다 밀려나는 그런 때였어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죽어나가는 때였어요. 어떤 어머니가 찾아와서 도대체 이렇게 진두지휘하면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남겠냐고 이러면서 한심해할 정도로 밀리던 때였어요.

그 때는 이런 생각을 했죠. 미군이 저렇게 강하고 저렇게 폭격을 쏟아붖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린 그랬죠.

우리 또 하루를 살았구나, 이렇게 하루 단위로 우리의 삶을 애기했어요. 실제로 솔직히 얘기하면 나는 순간 순간 많은 회의를 했어요. 우리가 정말 미군을 몰아낼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그런데..그때는 나에게 어떤 의식이 없었어요. 인간의 의지라는 것인 막연한 것이나 희망이 아니에요. 의식하는 힘, 의식하는 의지인 것 같아요.

베트남 전에는 특징이 있어요.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갈지 우리 모두가 시간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갈지, 언제 끝날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그렇게 생각했어요. 할아버지 때 우리가 전쟁에 이기 못하면 아버지 대에 싸우고 그 때 또 못 이기면 우리 대에, 그랬어요. 그리고 또 우린 공간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강이든, 도시든, 숲이든 미군이 나타나면 싸웠습니다.

우리가 싸울 때 마치 씨름하듯이 미군을 엎어트려 이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군을 이기거나 싸워서 이기거나 한다는 의지보다는 다만 언젠가 그들을 몰아낼 것, 더 이상 우리와 싸우려는 의지를 없애리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나 개인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이후에 모여 애기했어요. 이렇게 우리가 많이 죽고 희생을 치렀는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승리를 주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그렇게 말했죠.

 

 

 

질문5

말씀을 들어보니 전쟁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의 예를 들자면 데로 때에 보면, 데모는 나가되 돌은 안 던지겠다 했는데 이후에 돌은 던져도 화염병은 안던질거야 하는데 나중에는 쇠파이프도 들게 되더라구요. 어떤 목적이 좋은 것이라도 상황에 맞딱드리면 어떤 감정이 생기게 되는데, 어땠는지요?

 

반레 

사실 어떤 실제 상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이 굉장히 강하게 얘기하죠.  실제로 매일 전투가 벌어지고 매일 눈앞에서 내 친한 가족이, 동료가 쓰러지는 상황들이 벌어지면 내 맘속의 증오가 생기는데 그 것은 내 이성으로 통제가 안되죠. 내가 이성으로 통제하는 법주에서 벗어나게 되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성으로 나를 제어하고 통제해야 하는 그 순간이 가장 이성의 통제가 안되는 벗어나는 상황이 되는 거죠.

내게 친한 여성 친구가 있었어요. 1975년 4월 30일 정각 우리가 싸이공을 해방시켰는데요. 그런데 11시 30분에 싸이공이 해방되었는데도 내 친구가 있는 부대는 1시까지 싸이공 부대에 포위당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 친구가 확성기를 들고 이제 평화가 왔습니다. 이제 총을 버리고 모두 평화를 받아들입시다! 했는데...실제 내 친구의 병력이 그 싸이공 병력의 10배가 넘어서 무기로 하면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친구는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끝내고 싶어해쑞. 하지만 그쪽 싸이공의 과격 분자가 내 친구에게 총을 쐈어요. 그러자 우리 부대 사람들도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죠. 그런 후 그쪽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도 납득이 안되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고 아이를 꺼내고 하는지 난 정말 이해가 안되요. 어떻게 한 살도 안된 아이의 간을 꺼내고 베트콩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그래요.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라 생각되고 증오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그런 것이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군중은 군중심리에 쉽게 휘말리잖아요. 그래서 지휘관이 이런 시기에 이성을 잃지않고 명석한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에서도 한국의 학생운동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정부와 싸이공 정부에 대항하는 시위가 있었어요. 저는 예전의 다큐 프로그램을 보는데, 어떤 스님이 자신의 팔을 그어 그 피로 글을 쓰는데,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질문6

현재 FTA 문제나 지금 베트남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개혁, 개방이 혁명에 대한 투항이라고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반레 

첫 번째는 우리가 그런 이상을 가졌을 때, 우리의 이상은 사회주의의 전초기지가 되겠다고 했어요. 사실은 혁명적 낭만이란 게 있어요. 낭만주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나와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어요. 나는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내가 그 시기에 혁명을 굉장히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가, 우리 이상이 찬란히 빛났던 시기에는 우리에게 실제 어떤 치기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우리가 베트남정부가 혁명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것 때문에 엄청난 댓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제 말을 듣고 피식하고 웃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 때 우리는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우리 인민을 협동농장에 몰아 놓고 우리의 인민을 배부르게 살찌워야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는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어요. 우리의 의지는 정말 순수하고 우리 인민을 위한 것이었지만, 세상에나 우리 인민들을 협동 농장에서 평등하고 배부르게 살찌우겠다고 했으나 우리 어머니들이 반대하는 거에요. 그 때 우리와 우리 인민, 어미니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에 당황했었어요.

그래서 난 어머니들을 붙들고 물었어요. 세상에 전쟁에 자신의 자식을 다 내놓고, 남편을 내놓고 무엇이 아까워 이 작은 땅덩이를 내놓지 않으려 하십니까? 하니, 어머니들이 아니다, 나는 이 땅덩이 하나도 안 아깝다. 허나, 우리 자식들을 묻을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거에요. 결국 협동농장에서...여러분이 보기에 베트남이 무진장 넓잖아요. 비옥하고 그 넓은 땅, 비옥한 땅에서 쌀이 얼마 안나는 거에요. 소련에서 800만톤이나 되는 쌀을 수입하여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 오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다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었어요.

여러분 상상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로 결정한 때가 1988년이고 1989년에는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생산했고요. 1990년에는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 아시나요? 작년에 쌀 수확량이 500만톤이 넘었어요.

혁명을 하고도 인민이 배고프면 혁명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혁명도 새대에 맞춰야 한다고 시대에 맞는 이상이 있다고 그 때는 우리의 이상은 누구든 협작사에 들어가는 것이 모범이었고 그 때는 우리가 똑같이 나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점점 사람들이 배고파지기 시작했어요. 한해가 가고 한해가 하고...결국 인민들이 기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결코 혁명이 불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에 맞는 혁명 정신이 있다고 보고 지금 사실은 어떤 이상을 가졌던 간에 똑같이 지고 있어요. 이제 이상의 폭도 이념의 폭도 없이 세상이 똑같아 지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여전히 공산주의자에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에전에 가졌던 세계 혁명의 논의들을 마주앉아 하고 있지는 않아요. 민족주의 개념도 우리 안에서 많이 바뀌었어요. 내 안의 가족, 공동체 개념 등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제는 예를 들면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어요.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있어요. 우리를 침략했던 모든 나라를 우리의 적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같이 갚 친구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미국, 프랑스, 일본, 한국, 중국 등 우리 주변에 적들 아닌 나라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과거의 적개심을 키우는 거보다 공존의 슬기를 키우는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내게 아주 절친한 외국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아주 직설적으로 '너희는 언제가 되어야 구걸하지 않겠냐?, 왜 너희는 이 나라에서 이만큼 원조를 받았고 저 나라에서 저만큼 원조를 받았다고 떠벌리냐, 그래서 나는 그 대 우리가 우리의 인민을 배를 불리지 않으면, 어쩌면 사회주의 이상 안에는 우리 인민의 배를 불리느냐가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베트남에서 심하게 논의가 되고 있는 것이, 당원들의 결제활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당원들에게 경제활동권을 주는 것에 대한 논의에요. 이것은 예전에 우리가 가졌던 공산주의 이념에 위배되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해요. 우린 공산주의자인데 공산주의 도덕성을 가지고 자본에 참여하면 자본의 도덕성을 높여주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이 과정에서 공산당원들, 참여를 하게 되면 노동자들의 분배방식이 달라지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이정도밖에 답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시간이 제게 어떤 의미를 잦느냐면요, 과거의 아픔을 건들거나 내가 잊고 있던 과거의 이상을 건들거나 하는 자극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만나는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기에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에 잠자고 있는 전쟁의 기억을 깨우는 것이 얼마나 여러분들에게 재밌겠냐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잃었던 도덕이라던지 인간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미 여러분은 지나치게 충분히 과거에 대한 대한 고문을 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편안히 맘도 쉬고 안식을 가지시길 빕니다.

여러분들 건강하시고 여러분들 앞에 많은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1. 대담 기록 : 반 레 (Van Le) / 7기 진료단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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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담 기록 : 탄 타오 (Thanh Thao) / 12기 진료단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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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담 기록 : 반 레 (Van Le) / 6기 진료단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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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미마을 응우웬 티 탄 아주머니와 뚜이엔(다낭외대 한국어학과 교수)와의 간담회 / 20기 진료단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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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퐁니마을 위령비 참배 및 응우웬 티 탄 아주머니와의 간담회 / 20기 진료단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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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Duy Xuyên (유이쑤옌) 현 통합 위령관 및 생존자 만남 / 20기 진료단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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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생존자(유가족) 만남 기록 : 꽝남성 하미마을 고 팜티호아 Phạm Thị Hoa 할머니 유가족 / 19기 진료단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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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생존자 만남 기록 : 꽝남성 (Tinh Quang Nam), 디엔반현 (Huyen Dien Ban), 디엔안사 (Xa Dien Tho), 퐁니촌 (Thon Phong Nhi), 응우옌티탄(Nguyễn Thị Thanh) / 18기 진료단 (2017년)

    Date2018.11.30 By평연 Views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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