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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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짱 시인 만남(2008).JPG

 

 

 

 

 

이른 아침 뜰에 나가 수련꽃을 땄네
폭탄 구덩이 아래 어머니가 심은 수련꽃
아아, 어디가 아프길래 물밑 바닥부터
잔물결 끝도 없이 일렁이는가
몇해 지나 폭탄 구덩이 여전히 거기에 있어
야자수 이파리 푸른 물결을 덮고
아아, 우리 누이의 살점이던가
수련꽃 오늘 더욱 붉네

- 찜짱,「수련꽃」전문

 

 베트남의 국민시인으로 칭송되는 찜짱 시인의 대표 서정시 ‘수련꽃’의 전문이다. 불과 8줄짜리 서정시에 불과한 이 작품은 베트남 민족이라는 나라가 전쟁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내와 희망’으로 이룩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16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한 찜짱 시인은 열여덟 살 때부터 베트남 혁명운동에 가담한 항전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지금까지 10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지난 1981년 「길에서 쓰러진 여러 가지」라는 작품으로 베트남작가동맹 최고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베트남시인협회 부주석과 호치민시작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에서는 2008년 찜짱 선생님과 만났다.

 안타깝게도 2011년 9월 29일 오전 7시 운명하셨다.

 故 찜짱 시인님의 명복을 빕니다.

 

 

 

 

대담 기록

 

 

:: 일시 _ 2008년 3월 23일(일) 오후 2시 30분

:: 장소 _ 호치민 식당

:: 통역 _ 구수정

:: 사회 _ 이선영

:: 기록 _ 장병권

 

 

* 시인 소개

 

구수정

찜짱은 흰 새라는 뜻입니다.  왜 필명이 찜짱이세요? 가 가장 궁금했는데 선생님은 18살부터 혁명에 참여했고, 75년까지 전장을 관통하면서 살았던 분입니다. 당시 흰 새의 이미지는 평화의 이미지로 다가왔고, 처음 글을 쓰면서부터 필명을 흰 새, 찜짱이라 하셨습니다.

 

인사말 부탁드립니다.

 

찜짱

안녕하세요 여러분. 베트남을 찾아주셔서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2000년부터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활동을 익히 알고 있었고, 베트남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베트남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보내는 이 시간동안 여러분들에게 흥미롭고 감동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수정

선생님이 남부 사투리가 심한데 선생님의 고향은 벤 째입니다. 아마 지금도 이 지역은 베트남에서 최극빈지역이고 여기서 3,4시간 거리입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이름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18살에 굉장히 유명한 변호사가 운영하는 조직(공산당의 지부와 같은 역할)으로 항미애국투쟁을 하던 변호사가 만든 조직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55년 고딘디엠 정권이 남부에 미국 대리 정권으로 서게되는데 당시 국회의장을 겸임하던 고딘디엠을 대항하던 투쟁으로 국회에 폭파하려는 폭팔물을 옮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국회를 폭파하려던 생각은 없었고 단지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차량을 폭파시켰고 구속이 되었습니다. - 1960년 유명한 정치 감옥에 수용이 되었고 고문을 당했고 몸이 악화가 되어서 감옥 병원으로 옮겨지고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러니 바로 출생신고서부터 모든 서류를 다 바꾸게 됩니다. 당시 레옹 퐁 (영재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신원이 발각이 될 것 같아 또 다시 다른 사람의 신원을 훔쳐서 사립학교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 반바’가 본명이며 올해로 70세입니다. 항상 빵모자를 쓰고 다니시고 아주 최근까지 베트남 문예신문사에서 일을 하셨고 은퇴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사립탐정이란 드라마이며 사립탐정 대장으로 직접 출연한다고 합니다. 왜 배우를 하시려고 했느냐고 했더니 은퇴하고 나니 인생에 있어서 더 재미있는 일이 필요하고 찾게 되었다고 하시네요. 무척 정열적인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활발하게 질문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은 11권이며, 공동저작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베트남을 대표하는 국민시인이며 어떤 시를 대표적인 시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호아숭 (수선화)를 꼽으시네요. 시인에게 시낭송을 부탁드립니다.

 

찜짱

호아숭 낭독

베트남시에는 은율이 있어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느낌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수정

한국어 낭독

 

구찌터널을 가면 폭탄이 만든 구덩이가 있죠. 선생님 동네 곳곳에 이런 구덩이가 있고, 이 곳에 물이 고이면 수련 꽃을 심었다고 합니다. 이 시는 베트남에서의 국민시에요. 북부베트남은 자원한 군인, 남부베트남은 징병 해방군 편에 싸웠던 자원 군인들이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마을의 어머니들이 전사들을 키웠고 그 전사들은 이 어머니들을 양어머니로 불렀습니다. 전사를 키워준 어머니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전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수집하고 해서 만든 사이공의 흰옷처럼 선생님의 시도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당시 사이공에는 단 하나의 출판사도 없었고 북부에 있는 곳에서 어렵게 인쇄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교차로’라는 시집으로 상을 받게 되구요.  

 

선생님은 아시아작가 평화포럼으로 2005,6년 참가했습니다. 2007년 제주도를 방문하셨고 4.3항쟁 학살지도 방문하셨습니다.  

 

 

질문 _ 송정록

이번 진료단 단장입니다. 말씀하시기 어렵겠지만 여성박물관에서 보았지만 선생님의 어머니도 참 훌륭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머니셨습니까?

 

 

찜짱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을 3번 갔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군중, 대중들을 만난 것은 아니었어요. 저한테 소중했던 것은 한국의 어머니들을 만난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에게는 어머니라고 했어요. 저한테 소중한 기억이었듯이 여러분이 저의 어머니에 대해 물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희 어머니는 벤 째에서 저를 낳으셨고 벤 째에서 농민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45년 이전에 태어나셨고 어머니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마 살아계셨으면 90이 넘으셨을 거에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었습니다. 여성들이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고 어머니는 학교를 다닌적이 없으셨습니다. 문맹이셨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글자를 터득하셔서 신문과 책을 읽었고 이름 석자 사인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글을 배우시고 책, 신문을 읽었던 모습이 제 기억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모릅니다. 75년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아머지는 당원이었고 그래서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힘들었고 어머니도 잘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18살에 벤 째를 떠나 사이공으로 오면서 어머니와 계속 헤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제 어린 시절 기억이 유일합니다. 나의 어머니는 굉장히 부지런한 분이셨고 굉장히 총명하신 분이라고 기억합니다. 늘 일을 하셨는데 농사를 지으셨고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했기에 시장에서 장사를 틈틈이 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극히 평범하신 분이었습니다. 보통 남부 어머니들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하지만 전쟁 때 평범하지 않은 어머니로 변하셨습니다. 제게 남아있는 기억 몇 가지는 프랑스 식민지 당시 베트콩이 어머니에게 마을에 남아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연락, 쌀 공급 등의 활동을 (당시 마을은 이미 사람들이 피난을 갔지만) 어머니는 마을에 혼자 남아서 시장에 가서 물건을 가져다가 베트공들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살던 집이 3번 이상 폭격을 맞았었어요.

 

어머니는 이모와 외삼촌가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저와 헤어져야했어요.  머니는 저를 사이공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다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또 다른 기억은, 자원해서 입대하던 날, 어머니가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벤 째에서 동부지구(항정구)로 가는데 어머니가 너무 기쁘게 마중을 해주셨고, 제가 자꾸 뒤를 돌아보니까 어머니가 냉정하게 뒤돌아 가셨어요. 그때 그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제가 그랬듯이....

 

결론적으로 싸(읍, 면)에서 저희 어머니는 싸를 대표하는 50인 여성 중에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의 어머니들이 그러했습니다.  

 

질문 _ 신운_

파란만장을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 마다 자신을 지탱시켜준 생각이 무엇인지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 한국의 상황을 아신다면 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찜짱

첫 번째 질문은 힘들어서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해보겠습니다. 사실 두 번째 질문도 쉽지는 않아요. 제가 한국을 갔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한 번은 갔었어도 행운이었을 것인데요. 2005년 갔을 때 한 지역에 있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났고 만나는 층이 교수, 학자들이었습니다. 영어, 한국어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만나긴 했지만 한국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젊을 작가들을 만났는데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작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두 번째 2006년 김지하씨가 주최한 학술회의 때 행운은 작가들과의 만남이었고, 세 번째 한국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곳은 임진각 DMZ, 부산을 거쳐 제주에 갔습니다. 한국을 보다 이해하는 경험을 주었습니다.

 

한국은 저에게 제가 최초로 간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소련, 독일, 몽골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은 다녔는데.. 몇 가지 인상은 한국은 능동적인 사회, 현대적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차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구나..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니 젊은 아이들이 자리를 양보하더군요. 그럼에도 딱 한국하면 인상이 참 차갑다는 인상이었습니다. 한국의 이 차가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차갑다고 하는 것이 표정이나 성격이나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6시가 되었는데 아무도 안일어나더군요 호텔을 나갔는데 길을 잃었는데  호텔을 다시 찾는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시간 동안 8명의 한국사람을 만났습니다. 첫 번째 50대 사람이 영어도 짧으니 호텔 명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탁 뒤도 안돌아보고 가더군요. 그 중에 4명이 참 차갑게 대했고 4명은 어떻게든 나에게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젊은 사람은 명함을 보더니 총알처럼 말을 하더군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50,60대 만난 사람이 험악하게 무서웠습니다. 인상을 붉히며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먼 거리까지 데려다 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먼저 가더군요.  

 

작가들을 만나거나.. 한번 낯을 익히면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표현을 잘 못하는 등 이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했습니다.  

 

지식인들이긴 했지만 자신들의 과거를 미안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작년 제주도를 갔었을 때 왜 그렇게 제주도가 아름다웠냐면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제주도가 너무 슬픈 땅이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이 납니다. 넓은 길이 황폐했고 길 옆에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것들을 다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니 아이들 무덤들이 있었습니다. 언뜻 풀무더기 같았지만 무덤이었습니다. 그 앞에 서서 당연히 저는 베트남 학살을 생각했습니다. 같이 갔던 베트남 사람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깊은 인상도 받았고 갔다 와서 영문으로 제주 학살을 찾았습니다.  찾았는데 자료가 없었어요. 세계인들이 모른다면 감춰진 학살이라고 한다면 우리 베트남 학살과 마찬가지로 제주 학살도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해)제가 감히 한국에 대한 충고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도 답해야겠죠? 제가 감옥에 간 것이 20, 21살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니 철문이 쾅하고 닫혔습니다. 그런데 나는 평안한 상태였습니다. 아직 고문을 당하지 않았는데 쾅하고 닫힌 소리에 온 몸의 신경이 움직였습니다. 발자국 소리 등.. 아마 자유에 대한 고민을 절박하게 한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여기를 빠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전장에 있을 때 매일 내가 오늘 여기 앉아있지만 내일 여기 앉아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그러했으니까 (죽었으니까)

 

내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면 ‘그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죽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 강연에서 이야기 한 것인데. 베트남 전쟁당시 방문한 야전병원에서.. 어떤 의사는 의술을 전장에서 익혔습니다. 간호사 되는 사람들이 의사역할을 할 정도로 의사들이 부족했습니다. 부상자들이 몰려오고.. 한 부상병은.. 온 몸에 파편이 박혀있었습니다.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다리를 잘랐습니다. 마취약도 없었습니다. 그 과정을 보고 도왔고 이런 경험들이.. 말라리아 같은 것들이 안무서워지고 배고픈 것도.. 굶주림 같은 것도 ..   비상한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그땐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던 내가..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때 나는 전쟁을 기억하는 것으로 극복을 했습니다. 전쟁의 상실, 내가 겪었던 경험...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극복을 했습니다.  

 

질문 _ 이현정 _

진료단이 더 많은 것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번 진료단이 무엇을 얻었으면 좋겠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찜짱 _

제가 아까 했던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9번 10번 정도 오셨는데..  베트남을 얼마나 이해를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활동..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노력, 진료하는 활동.. 베트남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활동..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굉장히 많은 활동들 통해서 이 시간이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고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 선물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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