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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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3월 20일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진료단과 첫 만남을 가진 탄타오 시인은 1946년 꽝 아이 성에서 출생하여, 1969년 하노이 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최전선 전투병을 자원했다. 1978년 『초원을 건너는 발자국』이란 시로 베트남문인 최고상을 받았으며, 1996년 장편 서사시 ‘미 라이의 아이들’이 실린 시집 『태양의 파도』로 두 번째 베트남 문인 최고상을 받았으며 베트남 중부 대표시인으로 불리 운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에서는 2001년, 2002년 꽝아이성 진료시에 만났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서로 마주 도네. 어둠은 빛을 향해 돌고 두 잎새 얼굴을 맞대고 두 숨 들이쉬고 두 날개, 날고,  회오리치고, 숨이 막혀오네.

 

우리 둘은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별들이 지는 순간을 위한 사람들. 우리 둘은 김을 내뿜는 두 개의 바윗돌. 멀고 먼 무언가를 탄식하려니 어느 누구도 갈대 대롱 속에서 어떻게 울어야 할지 알려주지 않았건만 울음소리 다시 노랫소리가 되네. 어찌하면 아주 적은 양식으로 아주 적은 희망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약속으로 살 수 있을까? 두 잎새 두 박자로 떨고 바람은 소스라쳐 터져 나오는 소리 사이에 갇히네. 나팔소리 자지러들고 터져 나오고, 가슴을 휘젓는 숨 단 하나의 출구밖에 없네. 우리 둘 서로에게 달아나네. 음울한 밤. 올빼미 우네. 우리 둘은 길 잃은 숨, 대롱 속의 길 아득하고 속삭이는 소리 끝이 없는데 알지 못하는 세계의 매혹. 우리 둘은 서로의 숨을 가두고, 서로의 꿈을 숨기고, 마지막 한 알의 감자를 나누고, 마지막 대롱주를 나누고, 잎새 위에 마지막 달빛 한 움큼을 모으네. 숲은 애인의 향기와도 같은 자기만의 냄새를 가지네. 숲은 짧은 숨결 따라 몸을 떨고 가끔 행복에 겨워 몸을 비트네. 흠뻑 젖네. 나팔소리에 이슬이 지고 도마뱀 두 박자로 울고, 달 같은 손가락들 젓가락을 휘젓네. 나팔소리 자지러지네. 항구에 닿은 배처럼, 여관의 불빛을 발견한 나그네처럼, 구름을 만난 새처럼, 불을 만난 감자처럼, 대롱 속에 익어가는 술처럼. 나팔소리 코맹맹이 소리로 휘몰아치네. 돌덩이가 구르네. 울분의 밤. 나팔소리 가슴을 태우고 창자를 긁고 눈물을 흩뿌리네. 나팔을 부는 두 사람 두 구름 그림자 두 잎새 서로 얼굴을 묻네. 과거를 향해 가파르게 불고 미래를 향해 매끄럽게 부네. 이마의 발자국, 주름살 불어 날려버리네. 웃기 위해 부네. 흐느끼기 위해 부네. 불어 지구의 숨을 끊네.

 

    - 탄타오, ‘아맙 나팔을 부는 두 사람’ 전문

 

 

 대담 기록

 

:: 기록 - 조성민

:: 진행 - 이성오

:: 참여 - 탄타오, 통역 - 구수정 선생님

:: 장소 - 베트남 호이안 박당 호텔, 세미나실

:: 일시 - 2009년 3월 18일 오후 8시

 

총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노이에서 바오닌을 만날 때와는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하노이 도착하자마자 만나셨고. 어제 오늘 답사 다녀왔는데 이중의 2/3 가 다녀왔기 때문에 미라이 박물관과 하미마을과 퐁니 마을을 접한 상태에서 탄타오씨가 얘기하는 것은 바오닌과는 약간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먼저 탄타오 시인에 대한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자료 읽어 보신 분 알겠지만 53페이지에 나오거든요 추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정보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미라이 박물관 가보셨죠? 거기가 고향이에요. 거기서 태어났고 1979년에 베트남 작가 동맹상과 최고 문인상을 수상했는데 최고의 베트남 문인에게 주어지는 두상을 다 받은 분은 최초라고 합니다. 미라이 아이들이라는 책으로 등단했는데 여기서 뭐라 했냐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미라이 황무지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서 희망이 싹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베트남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이 자리에 모셨는데 개인적으로 예전에 초반에 오셨던 분 알겠지만 말했던 것처럼 1~4기 까지는 꽝아이. 5기~9기는 빈딩. 10기는 꽝남으로 왔는데. 꽝아이 때 오늘같은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10기라는 뜻 깊은 자리에 모셔서 의미가 깊습니다. 소개는 이정도로 마치고 얘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구수정

제가 그 이이야기를 하기 전에 탄타오 선생님하고 우리 베트남 평화 의료 연대하고의 선생님들이 모르는 얘기가 있어요. 작년이 한국에서 제주 4.3 학살 60주년이었거든요 그래서 제주도에서 굉장히 큰 규모의 수 천 명의 위령제가 있었는데 탄타오 선생님이 거기에 갔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에게는 제주와 미라이가 만나는 첫 번째 만남이다라는 의미가 있었고, 그 뒤부터 제주민예총 여러분들이 꽝남성을 방문해서 제주와 미라이의 만남을 이어가는 예술 문화 공연도 하고, 심포지엄도 하고, 이런 시간들을 해마다 갖기로 하고 작년에 1회 때 제주민예총에서 작가, 시인, 무용가들이 50여명 넘게 꽝아이 성을 방문 했습니다. 너무 당혹스러웠던 게 탄타오 선생께서 꽝아이 성의 문학예술회의의 주석으로 계셨는데 한국에서 60명이 오면 엄청나잖아요. 꽝아이는 베트남에서 제일 못사는 곳이거든요. 근데 왔을 때 호텔, 차량, 매끼 식사 모든 비용을 저희들이 한 푼도 못 내게 하시는거예요. 1년 예산을 아마 다 썼을거예요. 탄타오 선생이 다 부담하셨어요. 저는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여기까지 와서 신세를 지면 안되는데. 이러시면 안된다고 했더니 뭐라 하셨냐면 나에게 빚이 있다. 예전에 건치 치과선생님들이 활동할 때 그 때는 내가 주석도 아니고 여러분 도와줄 위치에 있지 않아서 여러분들 처음 와서 너무 힘들 때 너희들을 도와주지 못했는데 그 때 그 치과선생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올해 내가 베트남문화예술회의 주석 마지막 해고 내년에 은퇴한다. 그 빚을 다 갚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제주에서 찾아온 이 친구들에게라도 갚고 싶다라고 얘기 했어요. 여러분 이렇게 와서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큰 의미 없을거라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10년이 지나서 이 땀방울을 오랜동안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다는거. 그것 때문에 제가 길게 얘기 했습니다.

 

탄타오

먼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인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리가 불편하고 몸이 안좋아 앉아서 여러분과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와서 보니까 여러분 참 인원이 많은데 제가 많이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작은 시집인데 제 시집인데 시집을 고르다가 여러분께 전하고 싶어 고르다가 이 시집을 고른 이유가 여기에는 제 시가 영문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집보다는 영문시집을 전하고 싶어서 가져왔는데 다섯 권밖에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얘기 시작하기 전에 제 마음이 담긴 이 시집을 전하고 싶습니다.

 

구수정

갑자기 탄타오 샘 만나서 시 하나 모르는데 갑자기 질문 던지라고 하면 막막할 것 같아서. 오늘은 짧게 탄타오 시인님이 말씀하시고 그거 듣고 질문 하는게 나을 것 같아요. 먼저 탄타오 시인 말씀 듣겠습니다.

 

탄타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평화와 선의를 대표하는 사절단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구요. 전쟁으로 굉장히 오랬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통 받는 우리 베트남과 꽝아이성 빈딩성을 거쳐서 꽝남성까지 찾아주신 여러분께 여러분들의 따뜻한 사랑과 맑은 영혼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우리 인민들에게 베푸는 따뜻한 손길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 이 자리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쩌우신 선생께도 인사 전하고 싶은데요. 쩌우신은 하노이 종합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제 오래된 친구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해에 둘 다 자원 입대 해서 쩌우신은 꽝남성 자신의 고향에서 투쟁하셨고 저는 남부전선으로 가서 싸웠죠.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해방된 이후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오래된 내 친구를 이 자리에서 만나게 돼서 쩌우신에게 특별한 인사를 전하고 싶고, 또 반가운 것은 그렇게 함께 전선으로 가서 싸운 내 친구가 꽝남성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간부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게 돼서 이 자리가 굉장히 기쁩니다. 오늘부터 이틀 전에 꽝아이성에서 있었던 미라이 학살 44주년 위령제가 있었습니다. 3월 16일에 일어났으니까 오늘로부터 이틀 전 정확히 44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그리서 지난 한달 간 꽝아이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그 중에서 호주, 미국, 영국, 폴란드 이런곳 에서 교수단이 방문해서 밀라이 아이들하고 한달 간 같이 지내는 영어, 노래를 가르치는 교류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 반백의 교수들과 막 자라는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지내는 교류프로그램에서 굉장히 감동 받았는데 여기계시는 여러분들도 진료하는 짬짬히 짤막한 한국어나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 한국군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특히 굉장히 많은 학살을 이 땅에서 저질렀습니다. 대부분이 베트남 중부지방이었는데 저희 꽝아이성 뿐 아니라 꽝남성 빈딩성 푸에성 등에서 아주 끔찍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바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모든 세대는 자신의 세대를 책임져야 한다고. 여러분들은 그 학살을 저질렀던 세대가 아니죠. 여러분들이 이렇게 베트남을 찾는 것은 고귀한 사명감으로 이 베트남을 찾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학살을 직접 저질렀던 세대도 아니고 과거 전쟁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세대도 아니지만, 이렇게 베트남을 우정의 마음으로 베트남을 새로운 관계를 위해 찾아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개개인들이 모두가 평화의 사절들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베트남에서 십여년 간 활동했기 때문에 베트남 중부지방의 여러 곳을 방문한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그런 곳을 방문하면서 우리 베트남의 인민들은 여전히 아주 많이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여러분 마음의 사랑, 여러분의 활동, 심지어는 여러분이 하는 작은 행동하나하나가 우리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고, 그들에게 굉장히 큰 기쁨을 안겨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한국을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감동받은 것은 눈부신 한국의 경제발전 속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동받은 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아주 견고하게 투쟁하고 아주 많은 희생을 통해 얻은 한국의 민주의 승리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되어 있지만 한국의 경제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민주의 승리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제게 있어서 생각하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 하나하나가 가지는 품성이고, 사회의 민주고, 인간이 인류에게 가지는 책임감. 이것이 경제의 발전보다는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이런 민주의 발전만이 경제의 발전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 하나하나는 베트남 사람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인류에 대해 가지는 책임감을 가지는 그런 것을 실행하는 한사람 한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여러분들하고 저하고 함께 의견을 서로 교환하고 서로 교류하는 그런 자리로 알고 있어서 제가 여러분들한테 일방적으로 하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고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사항을 질문 던져주거나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러분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총무님

박수 한 번 쳐주세요. 미라이 관련 질문이나 꼭 미라이 아니더라도 바오닌 작가한테 하지 못한 질문도 한번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질문이라도 괜찮고 질문이 아니라 하고 싶은 얘기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질문1

시집 중에 풀밭위에 남긴 발자욱 이라는 시집으로 최고 문인상을 받았는데 1978년에 탄타오 선생이 쓴 걸로 아는데, 이는 전쟁 상황 속에서 쓰여진 시처럼 느껴지는데 1978년에 어떤 배경 속에서 썼습니까.

 

탄타오

사실은 1971년에 쓰였습니다. 종전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그 시점에 시입니다. 시는 하나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 시를 반복해서 읽다보면 그 시에 담겨있는 하나 둘 셋 넷의 의미까지 읽혀질 수 있는 그런 게 바로 시니까 다시 한번 읽어보면 저절로 그 시가 어려운 시가 아니고 시에 담겨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질문2

베트남 전쟁 이전에 한국도 전쟁을 겪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전쟁과 평화에 대한 선생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여전히 희망은 있는 것입니까.

 

탄타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전쟁이 없던 적은 없습니다. 전쟁이라는 이 세계의 일부 인 것 같기도 하고 인류의 일부 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수많은 원인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종교, 정치, 민족분쟁이랄지 주변에는 전쟁을 일으키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앉아있는 순간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더 한 것은 세계 도처에 수많은 전쟁의 요인들과 함께 전쟁의 이기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전쟁을 끝냈던 베트남도 전쟁의 위기와 함께 살고 있고, 또 다시 전쟁의 맹아들이 자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큰 배후가 존재하는 한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전쟁의 위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저는 감히 도대체 언제쯤에야 우리 인류에게 이 전쟁이 진정으로 종식 될 것 인가에 대해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어느 누구도 인류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전쟁이 사라지는 그 날에 대해서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암울한 거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소련 작가의 말을 빌려서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가 그랬어요 아직 살아있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이다. 전쟁은 가고 또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우리가 사랑과 희망의 그런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고 말하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40년이란 시간에도 베트남은 굉장히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프랑스 식민 세력과 싸워야 했고, 그게 끝나자마자 다시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 침략 세력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75년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중월전쟁. 남부에서는 캄보디아와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수많은 군인이 희생됐지만, 여전히 많은 희생을 감내하는 것은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질문3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한테 항복해서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고, 남쪽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 통일을 해서 불평등한 세상에서 사는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상황하고, 시인께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였다면 지금 마음으로 어떤 것을 하겠습니까?

 

답변

사실 그 질문은 제가 한 번도 그런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였겠지만 한 번도 생각  해본적이 없는 질문입니다. 어쨌든 제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면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요. 이 전쟁은 베트남을 일으킨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침략해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제가 만약 그 상황에 있었더라도 이를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전쟁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 전쟁에 따른 희생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입니다. 물론 훨씬 더 많은 희생을 줄이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너무나 힘든 일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에 베트남과 미국의 힘의 관계가 절대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미국은 너무 강한 세력이었고, 저희는 힘의 상관관계에 있어서도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으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그런 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책 결정자가 아닌 시인으로서 대답입니다. 궁극적으로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두 가지 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사람의 깊은 인내심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베트남 사람들은 정말 끈질기게 잘 견디거든요. 그런 힘었는 데 이런 걸로 그 엄청난 미국의 폭격을 견딜 수 있었고, 햇빛 한 점도 들지 않는 깊은 땅굴 속에서 두더지처럼 살면서도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습니다.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 사람들이 존재할 때만 적의 아주 희미하게라도 패배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떄문이죠. 적어도 베트남 사람들은 존재함으로서 미국을 이겼던 것입니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이 전쟁 중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가지는 덕성이라고까지 얘기했고, 커다란 장점이기도 하구요. 심지어는 나는 이 덕성을 베트남 민족의 우월성이라고까지 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평화의 시기에 사는 베트남인들은 이 덕성이 너무 강해서 진정한 민주를 이루지 못하는데, 이것 역시 너무 많이 인내해서 그런게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이거는 또 평화의 시기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단점이 되는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문4

선생님에게 있어서 호치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탄타오

호치민은 내 개인에게 있어서 여전히 영원히 배워야 하는 거울이고,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표상입니다.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바친 그런 사람이었는데,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다 준 그런 사람입니다. (독립이라던지 이런 가치..) 호치민은 단순히 우리민족에게 큰 무언가를 가져다 준 사람일 뿐 아니라. 가졌던 그 정신, 마음 이런 것들은 저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호치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호치민이 마음에 품었던 마음의 열망, 갈망 이런 것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호치민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베트남 전체 사회의 민주, 그리고 우리 베트남의 모든 인민들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사는 그런 나라를 원했고 그게 바로 호치민이 가졌던 깊은 갈망이었을텐데 아직도 우리 베트남에서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호치민이 남겨서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말이 있는데요. 호치민이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호치민이 독립 바로 뒤에 자유를 붙였다는 거예요. 독립이라는 것은 그 당시 베트남이 가지는 갈망이었고, 자유라는 것은 베트남 사람 개개인 모두 모두가 가지던 그런 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치민은 단순히 그 조국이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 모두의 자유까지 갈망했다는 거죠. 만약 독립을 이뤘더라도 자유를 이루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호치민이 가졌던 염원이 실현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호치민을 흠모하고 이렇게 기리는 이유도 바로 그 호치민이 이 독립과 자유를 같은 가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독립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라면 이 말은 아주 단순한 구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치민은 큰 것만을 지향하는게 아니라 한 개인의 소망들 자유까지도 갈망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호치민을 흠모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질문5

베트남은 승리자이자 피해자 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미마을의 할머니를 만났는데 다리를 잃으시고 가족들도 한국군에게 살상 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오히려 저희를 뵙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눈물도 지으셨는데. 이런 걸로 할머니의 분노가 사라지셨을까. 탄타오 시인께도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이런 증오.. 어떠신지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탄타오

예 오늘 하미마을에서 여러분들이 만났던 그 할머니 같은 경우는 제가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베트남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양심을 대변하는 할머니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그렇게 잔혹한 일을 겪고도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증오나 분노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다 고 말을 한다면 그건 기만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평범한 분들 조차도 내가 증오해야할 대상과 내 친구를 알아보는 그런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거죠. 예를 들어 이 할머니가 전쟁 때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쏘아 죽였던 그 참전 군인들까지도 용서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당연히 증오와 복수심, 원한을 가졌겠지만 친구로서 찾아온 여러분들을 과거의 증오 떄문에 배척 할 만큼 비양심의 소유자는 아닌거죠. 이 할머니한테는 적과 친구를 똑바로 볼 수 잇는 그런 양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할머니라고 생각합니다. - 제(구수정)가 아까 통역을 하면서 오늘 저희가 만난 할머니가 저희를 보시면서 또이과 또이릿 이 말씀을 계속 하셨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애들이 그 멀리까지 찾아와서 불쌍해서 어떡해. 너무 불쌍해.. 불쌍해.." 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탄타오 선생님께 전달해드렸는데, 요 또아꽈의 의미에 대해서 탄타오 샘이 더 깊게 설명해주시고 싶데요. - 이것은 불쌍하다라는 표현이 맞지만, 여기 이 중부지방의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할 때 또이꽈 또이꽈라고 표현한다는거예요. 이 표현 속에는 불쌍하는 것 보다는 할머니의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하고 쩌우신 선생님이 전쟁 때 전선에 나갔을 때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보다 더 어린 병사들이었을꺼예요. 그 때 이 중부지방 가난한 마을에 가면 저희 같은 병사를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어머니들이 계셨는데 그때 저희만 보면 또이꽈 또이꽈 하셨어요. 너무 젊은 나이에 전쟁에 나가는 우리들이 불쌍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 말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애정의 표현이예요. 저희는 이제 세월이 지나서 늙었지만 그 말의 어감. 그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질문6 (베트남 통역학생)

굉장히 많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바오닌 선생님이 쓰신 전쟁의 소설의 결말을 보면 사실은 미국은 침략자였고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는 선악의 전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바오닌 소설의 결말을 보면 이 전쟁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데, 소설의 결말은 결국은 악이 선을 이긴게 아니냐.. 라는 뉘앙스가 있었습니다. 근데 선생님 직접 전투하셨고 그런 광경을 목격하셨는데, 선생님도 싸우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신적은 없습니까? 결국 베트남이 미국을 이겼다 하더라도 결국 이 전쟁을 통해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뤘다면 결국은 악이 선을 이기고 있는것 같다라는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탄타오

옛 이야기들을 보면 선이 악을 이기고, 양심이 늘 악을 물리치고, 선하고 착한 사람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고, 이런 일은 고전 속에나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옛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것은 이것이 인민들의 궁극적인 염원이고 갈망이기 때문이란다. 결국 전쟁을 통해 미국을 이긴 것 사실입니다. 바오닌 소설의 결말에서 받은 충격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거예요. 왜냐면 선이 악을 이기는 일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고. 그러니 얘야 바오닌 소설의 결말 때문에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단다. 이런 뉘앙스로 말씀 해주셨는데요. 결국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서 이겼지만 누가 이기든, 어느 편이 이기든, 인민은 늘 패배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민은 그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감내하고, 가장 많은 희생을 해야하는 사람들이기 떄문입니다. 다만 그런 인민들의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는 것은, 이는 고전 속에나 존재하는 인류의 마지막 염원, 늘 악이 선을 이기는 상황 속에서도 고전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인류가 가진 마지막 염원에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죠.

 

질문7 (베트남 통역학생)

호 아저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아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하셨는데, 우리 군인 아저씨들이 수많은 피를 뿌리고 수많은 희생을 해서 결국 우리 베트남의 독립은 얻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자유는 아직도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 자유라는 것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민주의 근간이 되는 것이 자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54년에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자유를 찾잖아요. 이 때 갑자기 베트남 문학계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요. 전쟁을 위한 도구로만 문학이 인식이 되다가 프랑스하고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예술인들 사이에 자유의 바람이 붑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문학 속에서 사회주의를 비판한달지.. 독재를 비판한달지 모든 것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요. 그 때 당시에 잠시 그랬다가 모든 작가들이 탄압을 받게 되고, 이게 문학사에 아직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험한 얘기예요. - (구수정 첨부) 우리 시내가 일례를 들면서 - 선생님 역사 속에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독립이 된 지금 오늘의 베트남의 문학과 예술에는 자유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습니까?

 

탄타오

호치민이 얘기했던 것 중에서 독립과 자유를 놓고 볼 때 호치민이 얘기했던 그 자유에 이르는 과정은 훨씬 복잡할 텐데요. 베트남의 문학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전쟁 중에는 쉽게 통일했어요. 문학도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 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통일하고 단결할 수 있었을텐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부터는 문학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 개인에게 좀 더 초점이 맞춰진다면, 민주라는 것은 공동체의 민주. 사회의 민주와.. 이런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어쨌든 자유와 민주라고 하는 이 개념들은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민주가 없는데 자유가 있거나 이런 것은 안됩니다. 어쨌든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 베트남 문학이 전쟁을 떠나서 인간의 운명, 숙명, 고통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전쟁만 얘기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문학이 자유에 이르는 이 과정은 전쟁처럼 단순하지 않았어요. 굉장히 복잡한 여러 문제들이 얽혀서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베트남 문학의 진정한 자유가 오려면 결국 사회의 민주화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베트남의 문학인들 베트남의 작가들이 자유에 이르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문학을 이용해서 표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의 민주가 굉장히 요원한 만큼 문학과 예술의 자유도 굉장히 요원한 상황입니다.

 

총무님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또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받고..

 

질문 (민희경)

지난번 제주 4.3 사건 말하셨는데, 서로 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그러다보니까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들끼리 삶을 살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말해본다면, 베트콩, 우리의 적이었던. 공산당을 죽이러 간다. 라고 생각하고 참전했고. 민간인 학살도. 우리의 같은 민족을 죽였던 그런 마음으로. 공산당을 죽인다. 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후대에 와서 전쟁을 하지 않았던 우리가 그분들을 이해하는게 그런게 아니었을까 하고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린거고. 제가 질문을 하고 싶은건 우리나라가 총부리를 서로 겨눈 과거가 있던 것........ 통일 후의 이념 갈등 어떻게 해소했는지 궁금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통일 이후에 화합을 이루는 방법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탄타오

굉장히 깊은 질문을 던져주셨어요. 질문을 주신데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요. 저희는 남한과 북한을 한꺼번에 호칭할 때 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이 조선이 통일에 가는 길.. 이미 베트남이 가본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진정한 민족의 화합을 이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까 말씀하신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오래가는 것이거든요. 어느 한 순간에 누가 이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졌던 이데올로기 이런 게 사라지는게 아니죠. 그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도 똑같이 한 가정에 큰 아들은 남의 편에서 싸우고 작은 아들은 북의 편에서 싸웠던 고통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단순하게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어머니의 품에서 나왔다고 같은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베트남의 진정한 민족의 화합이거나 아니면 개개인들의 이런 민족이라는 틀 안에 잇는 개개인들의 완전한 화합은 아직 베트남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에게 통일을 이루었느냐 라고 한다면, 통일을 34년 전에 이뤘죠. 근데 통일을 통해서 민족 화합을 이루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아직 아닙니다.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너무 가혹한 것이어서. 저는 이제 34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이 전쟁의 모든 후유증. 모든 증오와 원한과 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이 진정한 화합을 이루려면 4~5세대는 지나야만 가능할거라고 생각합니다. 쩌우신 선생과 저처럼 직접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개인과 개인. 죽음. 증오와 갈등. 이런게 쉽게 사라지는게 아니죠. 베트남 민족의 통일의 화합을 통해서 한국의 통일과 화합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겠냐고 질문하셨는데 이건 좀 힘들어요. 베트남은 비록 옛날의 증오와 갈등이 옅어지고 있거든요. 제가 알기론 한국전쟁은 이미 반세기가 지난 전쟁이에요. 분단도 굉장히 긴 시간인데. 제가 한국에 가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당신 정말로 통일을 원합니까? 라고 했을때 놀라운 것은 나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굉장히 많았어요. 베트남은 통일을 하고도 민족 화합으로 가는 길이 4~5세대까지 가도 요원한다. 아직 통일도 못한 한국이 민족 화합으로 가는 길이 결코 쉽거나 하지는 않을꺼예요. 다만 이렇게는 생각합니다. 통일을 먼저 이루지 못하겠지만. 한국전쟁은 훨씬 오래됐으니까. 직접 겪었던 세대들은 다 늙고 돌아가셨으니까. 민족이 증오나. 이런 것들이 많이 옅어지게 하면서 점진적으로 화합에 다가가는 과정은 한국과 북한도 서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통일은 아직 먼 길이고 북한이 진정 통일을 원하는지 아님 남한이 원하는지 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통일은 먼 얘기지만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민족이 화합하는 과정은 지금이라도 한국이 밟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총무님

마지막 인사말을 듣고 이 자리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탄타오

 

 

 

우리 참 오랜 시간 같이 앉아있었죠. 여러분들도 내일 아침이면 굉장히 일찍 행보를 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잠시 토론을 끝내고 다음에 베트남 찾아주실 때. 여러분이 찾아오시는 한 또 다시 만남과 토론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는데. 친구로서 그리고 우리 모두 똑같은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렇게 베트남 인민들을 위해서 활동을 할  떄에는 여러분들의 한국 인민들을 위해서도 굉장히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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