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빈딩성   

Tinh Binh Dinh

 

 

 

1. 고자이 마을  :  5기 진료단 부터 9기 진료단 까지 답사

Tinh Binh Dinh, Huyen Tay Son, Xa Tay Binh, thon An Binh, lang Go Chai

-빈딘 성, 따이선 현, 따이빈 사, 안빈 촌, 고자이 마을

 

위령비

‘1966년 2월 26일 미제국주의의 지휘 아래 남조선 괴뢰군인에 의해

무고한 양민 320명이 학살당하다.’

 

빈딘 성 떠이손 현 따이빈 사는 베트남 문화통신부 공인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지다.

1966년 1월 23일(음력)부터 26일(음력)까지 모두 15개 지점에서 맹호부대 3개 중대에 의해 집단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실종자를 포함해 모두 1,200여명의 주민이 학살당했으며, 그 중 신원이 확인돼 명부에 올라있는 공식 사망자수만 해도 728명이다. 그 가운데는 어린이 166명, 여성 231명, 60-70세 노인 88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가족 전체가 몰살을 당한 경우도 8가구나 된다.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 특히 2시간만에 32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고자이 마을은 기록만 있을 뿐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만날 수 없었다.

 

특징

이 전투는 미 군항이 있던 퀴년에서 캄보디아 국경까지 베트남 중부지방을 동서로 관통하는 19번 도로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 유명한 안케 전투도 바로 이 19번 도로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빈딘 성 떠이손 현 떠이빈 사는 이 19번 도로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2. 뇨럼마을 - 9기 진료단 답사

Tinh Binh Dinh, Huyen Tuy Phuoc, Xa Phuc Hung, Lang Nho Lam

-빈딘 성, 뚜이푹 현, 푹흥 사, 뇨럼 마을 / 빈딘 성 프억흥 사

‘1965년 12월 22일 이곳에서 한국군에 의해 사람이 죽다.’

 

특징

집집마다 조그마한 묘비가 있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위령비가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뚜이픅현, 픅흥촌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북쪽은 남베트남의 군사, 경제적 혈맥이라 할 수 있는 1번 국도와 접하고 있고, 미군의 대규모 공군기지의 하나인 고꾸안(Go Quanh) 공항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이 지역과 서부 고원지대의 사활이 걸려 있는 군항이 위치해 있었다. 이런 연유에서 1965년부터 미국은 이 지역에 군사기지들을 빽빽하게 배치하고 남베트남 포병, 보병 병력들을 한국군, 주로는 맹호사단 병력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지역의 안전과 전장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하여 미군과 한국군은 뇨럼을 포함한 뚜이픅현 각 지역에서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뇨럼촌은 픅흥사에 속하는 7개 촌 가운데 하나이다. '뇨럼 유적지 역사 개괄서'에 따르면, 1966년 3월 23일 이른 아침, 뚜이픅현에 속하는 각 사를 향해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후 한국군이 각종 수송기를 타고 고보이(Go Boi), 늑만(Nuoc Man), 년한(Nhon Hanh) 등의 지점에 착륙,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들을 향해 진입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가옥에 불을 지르고, 소들을 쏴 죽였으며, 주민들을 몰아 한곳에 모았다. 뇨럼촌 들판 한가운데 암싹루옌(Am Xac Luyen: 싹루옌 암자) 사당이 있는 마을에는 당시 마이티므이, 응웬옘, 응웬티득, 쩐응앙 씨 등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다. 므이씨 집에는 인근 마을에서 한국군의 습격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 함께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윽고 이 마을까지 들이닥친 한국군들은 이곳 주민들을 계속 잡아놓고 감시했다. 오후가 되자 한국군들은 이들과 인근 마을에서 잡아온 다른 주민들을 모두 므이씨 집 마당에 모아 놓고 학살을 자행했다. 먼저 여성과 아이들에게 총격을 가한 후 남성들을 땅굴 속으로 몰아 넣고 총을 쏘며 수류탄을 던져 학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은 돌아가며 여성들을 윤간하고, 사람의 머리를 부수어 우물에 던져넣기도 했으며, 일부 시신들의 사지를 찢기도 했다. 학살이 끝난 뒤 한국군들은 시체 더미에 볏짚을 덮어 불태우고 포를 쏘아 산산조각내었다. 한국군들의 집단학살 지점은 므이씨 집 마당, 우물가와 땅굴, 쩐응안씨와 응웬티득씨 집에 있는 땅굴 등이다(9쪽).

 

 뇨럼 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인 쩐반쩌우(Tran Van Chau)는 진술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마을에 들어온 한국군들은 주민들을 체포해 한곳으로 모았다. 나도 그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암싹루옌에 이르자 그들이 내게 의자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게 껌을 하나 건네며 먹으라고 했는데 살기등등한 그들 앞에서 차마 씹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한국군 한 명이 싸응(Xa Ung) 할아버지의 아들인 꼬(Co) 형을 불러내 무어라고 물었다. 전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꼬 형은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갑자기 한국군이 그의 발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꼬 형이 두 손을 모아 빌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그의 종아리에 총을 쏘았다. 형이 빌고 또 빌었지만 한국군은 연이어 그의 허벅지에 총을 쏘았다. 꼬 형이 꼬꾸라지자 한국군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 한국군들은 여성은 이편, 남성은 저편으로 갈라져 앉게 했다. 그리고는 남성들에게 고개를 돌리도록 하고 먼저 여성 쪽을 향해 자동소총을 갈겼다. 모두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던 그들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몰살을 당했다. 그 뒤 한국군들은 남성들을 땅굴 속으로 몰아 넣고 더 이상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학살을 마친 한국군들은 시체를 모아 놓고 짚더미를 덮어 불태웠다. 한국군이 물러난 뒤에야 땅굴 속에서 기어나온 나는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달아났다. 반잇(Banh It) 탑 쪽에서 학살 지점을 향해 계속 포를 쏘았기 때문에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성들은 모두 발가벗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고, 우물가에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두 조각으로 찢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시신들은 산산조각이 나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유적지 보호구역 규정 서류'에는 뇨럼 유적지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유적지는 한국군과 미 제국주의가 베트남의 수많은 다른 곳에서 저지른 범죄들과 함께 남조선 병사들의 야만적인 죄악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5쪽).  

 

 

생존자

담 꽁 땀 (45세)

 

“남조선 군인들의 학살이 자행될 당시, 땅굴에는 할머니와 두 명의 친동생 등 내 가족 4명을 포함, 모두 11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 8명이 죽고 단지 나와 두 명의 친동생만이 살아남았지요. 나의 할머니도 그때 돌아가셨습니다. 현재는 내 동생들도 모두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문화박물관의 요청에 따라 몇몇 기자들이 마을로 찾아와 한국군의 양민학살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요. 당시 학살이 마을이 아닌 벌판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화통신부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이라도 기념비에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뜨씨는 1966년 3월 22일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38세였지요. 그가 죽자 한국군들은 그를 다시 땅굴에 던졌습니다. 그 당시 나의 친형은 이 마을의 부대에 소속돼 있었는데, 나는 한국군이 다리를 건너 마을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 후 다시 안년 마을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두 한국군들이었지요. 공격이 끝난 뒤, 한국군들은 주민들을 땅굴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져넣었습니다. 땅굴 하나당 세 개의 수류탄이 던져졌습니다. 그후 당시 희생자 140명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그 140명은 모두 지상에 있던 이들이고, 땅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땅굴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3. 떤장마을 -  9기 진료단 답사

빈딘 성, 뚜이푹 현, 푹호아 사, 떤장 촌

Tinh Binh Dinh, Huyen Tuy Phuoc, xa Phuc Hoa, thon Tan Dang,

- 빈딘 성, 뚜이푹 현, 푹호아 사, 떤장 촌

 

위령비

1966년 3월 23일 140명의 민간인이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죽다’

 

1965년에서 1966년, 빈딘성 뚜이픅(Tuy Phuoc)현에는 쯔응윽(Truong Uc)과 탑반잇(Thap Banh It: 반잇탑) 포병기지 등 미군과 한국군의 중요한 요새가 있었고, 픅호아(Phuoc Hoa)사에는 맹호 1개 대대가 주둔하는 고보이(Go Boi) 군사지구가 있었다. 또한 픅호아사의 북쪽은 혁명세력의 근거지인 바(Ba) 산과 접해 있었고, 남쪽은 반잇탑 포병기지, 뚜이픅 군리(郡里)와 면해 있으며, 서쪽에는 중부지방과 서부 고원지대의 중요한 군항인덤티나이(Dam Thi Nai)가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픅호아는 위의 군사거점들의 공격 시 베트콩들의 집결지로서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이유로 픅호아 주변에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일부 남베트남 보안대와 민병대의 부대들이 빽빽히 들어섰고, 1965년 11월에는 픅호아사 떤잔촌에 맹호사단 2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따라서 당시 픅호아사, 특히 떤잔촌에는 남성들과 청장년층 대부분은 다른곳으로 이주를 하였고, 마을에는 땅에 의존해 살아가는 일부 빈농들과 노인,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다.

 

 떤잔 학살은 일부 한국군들이 떤잔 지역을 수색하던 중 베트콩들이 길을 막아 상호 교전을 벌이다가 한국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그 후 1965년 12월 22일(음력 11월 29일) 동이 트던 무렵, 한국군 2개 소대가 두 개 병력으로 나뉘어 떤잔촌으로 바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국군들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사람이 있는 곳이면 노인이든, 여성이든, 어린아이든 가리지 않고 쏘아 죽였다. 마을에서 총성이 울리자 주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와집 등 자신의 집보다 견고한이웃집으로 피신해 모여 있었다. 당반푹(Dang Van Phuc)씨의 집에서는 모두 8명이 희생되었고, 팜딘(Pham Dinh)씨의 집에서는 모두 13명이 희생되었다. 그중 팜딘씨 가족 9명은 전원 몰살을 당했으며, 생후 7개월의 아이는 시체가 두 조각으로 찢겨 불에 던져졌다. 또한 한국군들은 응웬후인(Nguyen Huynh)씨 집과 응웬똥(Nguyen Tong)씨 집에서 각각 8명을 학살하였다.

 

  당반푹씨 집 학살의 생존자인 당흐득(Dang Huu Duc)씨는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나는 10살 정도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주해 있었고 집에는 나와 할머니만 남아 있었다. 우리 집은 비교적 견고한 기와집이었기 때문에 고보이 기지에서 포격이 있거나공중폭격이 있을 때면 주변의 이웃들이 우리 집으로 피신을 오곤했다. (…) 한국군들이 종종 마을에 들어와 수색을 하곤 했기 때문에 나는 '아마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별일 아닐 거야'라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 5명이 우리 집으로들어오더니 방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총을 갈겼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란티쭉(Lan Thi Chut) 아줌마(당시 만삭의 임산부)와 그의 아이들이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고, 나는 발가락이 날아가는 부상을 입었다. 아직 살아 계셨던 할머니가 나를 밖으로 데려나가 발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한국군들이 들이닥쳤다. 한국군 한 명이 총을 할머니의 머리에 겨누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할머니의 시신이 나를 덮쳤다. 내가 죽은 걸로 판단한 한국군들은 다른 집으로 몰려갔다. 잠시 후 내가 깨어나자 또 다른 한국군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체포해 고보이 지구로 끌고 갔다"(24쪽).  

 

  1966년 12월 22일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떤잔 학살에서는 모두 46명이 희생되었다. 그중에는 19명의 여성(1명의 임산부 포함), 14명의 어린이(뱃속의 태아 1명과 생후 7일의 신생아 포함), 9명의 60세 이상 노인이 포함되어 있다(32쪽). 현재 픅호아사 인민위원회는 학살이 일어났던 집들의 마당마다 희생자들의 집단 무덤과 묘비를 세워 보호관리하고 있다.

 

 

생존자

쩐 쑤언 깐 (72세)

 

“내가 학살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땅굴로 피신해 있었고 나 또한 땅굴로 떠밀려 들어갔는데, 마침 내가 들어간 땅굴은 이미 사람들이 죽어있는 땅굴이었기 때문에 한국군들이 더 이상 수류탄을 던지지는 않았죠. 내가 들어갔던 땅굴에는 모두 22명이 있었는데, 내가 그 땅굴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땅굴에서 들어 올려졌을 때 나는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재가 깨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버리고 이주했지요. 그 학살은 단 하루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내 가족의 경우에는 모두 4명이 살해되었고, 나 혼자만이 살아났을 뿐입니다.”

 

 

4. 낌따이 마을 - 9기 진료단 답사

Tinh Binh Dinh, Huyen An Nhon, Xa Nhon Phong, Thon Kim Tai

 

 

 낌따이는 년퐁사에 속하는 7개 촌 중의 하나이다. 낌따이라는 지명은 낌응옥(Kim Ngoc: 金玉) 마을과 다따이(Da Tai: 多才) 마을의 이름을 합친 것으로 재능이 많고 보물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유적 역사 개괄서'에 따르면, 1965년 1월 9일 빈딘성의 다른 지역과 함께 년퐁사가 "해방"되어 사에서 촌에 이르기까지 혁명정권이 세워졌다. 사 차원에는 약 100명으로 구성된 유격대대가 조직되었는데, 그중 1개 기동중대는 무기와 장비까지 갖추었다. 또한 모든 촌에는 조잡한 병기들로 무장한 1개 유격소대와 1개 민병중대가 있었다. 한편 1965년 말 빈딘성에는 약 2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한국군이 주둔했다. 안년현에는 미군이 101 공군수송 여단의 후방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쯔옹바던(Truong Ba Don)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한국군은 1번 국도와 19번 도로를 따라 흩어져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남베트남군은 3개 보안대대(약 450명)로 증강되었고, 그 밖에 10개 평정단(약 300명), 10개 민병중대(약 300명) 등이 배치되었다. 그들은1965년 내내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기 위해 년퐁사의 각 촌과 마을에 공중폭격과 포격을 가하고 소탕작전을 펼치는 한편, 평정단을 마을에 들여보내 주민들, 특히 해방구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민사심리전을 펼쳤다.

 

  1966년 1월 8일 미군 제1낙하산사단, 한국군 맹호사단과 남베트남 22사단 소속 병사들이 수송기를 타고 년한사 쯔이(Chu Y) 다리에 착륙했다. L19 정찰기가 이 지역의 지형을 관찰하는 것을 보고 소탕작전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했던 년퐁사와 년한(Nhon Hanh)사 유격대, 빈딘성 제50대대는 수송기가 병력을 쏟아내는 순간 바로 포위하고 공격해 1개 대대 병력을 전멸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년퐁사에 대규모 소탕작전이 전개될 것에 대비해 년퐁사 당위원회는 주민들을 바(Ba) 산 근거지로 대피시켰다. 그 다음 날인 1월 9일 새벽 4~5시경 년퐁사를 향해 집중포격이 시작되었다. 한국군은 두 병력으로 나뉘어 한 병력은 뇨럼촌을 향해진격하고, 나머지 병력은 년한사에 진을 치고 바 산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을 막았다. 오전 8시경 일부 한국군 병력이 낌따이촌에 들어가 집집마다 수색하고 노인과 어린이, 여성을 가리지않고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잡아들여 보데(Bo De) 언덕에 모았다. 한국군들은 사람들의 팔을 뒤로 돌려 묶은 뒤 다시 앞 사람과 뒷 사람을 연결해 묶는 방식으로 주욱 묶었다. 그리고는 그 근처에 있던 팜딘쩌우(Pham Dinh Chau)씨의 초가집으로 모두 몰아넣은 후 문을 닫아걸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마저 잦아들자 한국군은 짚더미를 던져 넣고 석유를 뿌려 초가집에 불을 질렀고, 단 한 명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집 밖을 지켰다.

 

 낌따이 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인 찐티남(Trinh Thi Nam)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나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포박이 좀 느슨한 상태였다. 그래서 간신히 밧줄을 풀고 아이를 안고 기어서 땅굴로 들어갔다. 오후에 한국군이 물러간 뒤 나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굴 입구를 가로막은 채 활활 타고 있는 집 기둥을 붙잡고 땅굴 위로 기어올라왔다. 이 불구덩이를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불길 속을 건너야 했다. 손과 발이 모두 불에 타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질질 끌어 저편 땅에 닿자마자 바로 정신을 잃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야 나와 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같은 날인 1월 9일, 팜딘쩌우씨 집에서 학살당한 주민들 외에도 한국군들은 인근 촌을 수색하여 약 200명 이상의 주민들을 체포, 보데 언덕에 다시 모았다. 여기에서도 한국군들은 사람들의 손을 뒤로 돌려 묶은 뒤 다시 밧줄로 앞 사람과 뒷 사람을 연결해 묶는 방식으로 모두 묶었다. 한국군들은 이 상태로 주민들을 묶어둔 채 이틀 동안 밥은커녕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갈증에 지친 어린아이들은 오줌을 받아 먹기도 했다. 또한 한국군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주민들을 마구 두들겨 팼으며, 밤에는 여성들을 끌어내 강간을 했다. 그날 밤 유격대와 성의 D50대대원들은 그들에게 학살당한 주민들의 복수를 위해 한국군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잡혀 있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치르게 될 대가가 두려워 그날 밤 년한사로 철수했다. 그 다음 날(1월 10일) 오후 한국군도 년퐁사에서 철수했다.

 

 1966년 1월 9일에 일어난 낌따이 학살은 <안년현 당위원회 역사>, <년퐁사 당위원회와 인민들의 혁명투쟁 역사> 등의 지방 역사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팜딘쩌우씨 집에서 학살당한 피해자의 숫자는 모두 37명인데, 그중 23명은 년퐁사 낌따이촌과 땀호아(Tam Hoa)촌의 주민(명단 확보)이며, 나머지 14명(신원 불명)은 다른 지역의 주민이다. 학살 장소였던 팜딘쩌우씨의 초가집은 당시 불에 타서 사라졌고, 현재 당시 희생된 이들의 집단 묘지만이 남아 있다. 1985년 안년현 지방정권은 학살이 일어났던 장소인 팜딘쩌우씨 집터에 증오비를 세우고, 년퐁사 인민위원회에서 동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벤깐(Ben Canh) 다리 옆에 증오탑을세웠다. 이 증오비와 증오탑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남조선 병사들의 잔인한 손아귀에 37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이곳에서 죽어간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기 위한것이다"(유적 역사 개괄서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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