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꽝남성   

Tinh Quang Nam

 

 

1. 하미마을 - 2기, 3기, 10기, 11기 진료단 답사

Tinh Quang Nam, Huyen Dien Ban, Xa Dien Duong, thon Ha My

-꾸앙남 성, 디엔반 현, 디엔증 사, 하미 촌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

 

 1968년 2월 25일 청룡부대에 의해 138명의 양민이 학살됐던 곳.

청룡부대 주둔지가 있던 곳. 주민들은 아침마다 군가를 부르고 태권도를 하고 부대를 편성해서 수색을 나가던 청룡부대원들을 기억하고 있다. 토요일이면 무대를 설치하고 연희를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68년부터 72년 사이에 부대 주변에 있던 마을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죽이고 시체를 밀어버린 것에 사람들은 분노를 하고 작전이 참혹했다고 전했다. 66년에 길을 닦고 67년에 주둔. 처음에는 주민들과 잘 지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집단양민학살을 하였다.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 복지회’가 주축이 되어 2000년 8월 이곳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월남참전전우 복지회에서는 위령비 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준공식을 할 수 없다고 우겼고 결국 비문은 연꽃무늬로 가려지게 되었다.

   

‘역사책은 기록하기를 바다와 강이 어우러진 디엔증은 남농권의 자손들이 호안선 산맥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땅을 열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국가의 기억을 세웠다. 주민들은 하미에 마을을 세우고, 쟁기질을 하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채소를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하늘이 조용하고 땅이 평화로울 때까지는. 그런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치며 그들이 왔다. 그들은 땅을 황폐하게 하고, 파도를 일으키고, 주민들을 전략촌에 가두고, 주민들로 하여금 마을을 버리고, 고향을 버릴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칼로 창자를 끊는 아픔을 주었다. 주민들은 땅과 강과 바다를 잃고, 쟁기질을 하고 생선을 잡던 직업까지 모두 잃었다. 그 악독함을 어지 다 말하리. 머리는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피가 강처럼 흐르고, 마치 마른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듯이 야자수 잎이 파괴되고 황폐해졌다. 눈물이 연못을 만들고, 한순간 사원이 재로 변하고, 하야(Ha Gia) 숲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캐롱 (Khe Long)선착장에는 시체들이 쌓였다.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집들은 불타고, 불에 그을린 시신들이 얼키고 설키고, 개미들이 불탄 시신들을 갉아먹고, 피냄새가 진동했다. 폭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그것보다 더했다.

무너진 집에서는 늙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신음하며 죽어갔고 아이들은 두려워 공포에 질렸다. 도망친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아기가 죽은 어머니에게 기어가서 젖을 먹었다. 더 끔찍한 것은 탱크로 무덤을 파헤친 것이다. 어둠은 이 지역을 덮었다. 풀이 시들고 뼈가 말랐다. 원혼은 잠들지 못하고 여기저기 뒹굴고, 분노는 푸른 하늘에까지 닿았다.

 그러나 하늘은 암흑이었다가도 언젠가는 밝는다. 우리 고향이 다시 평안 속으로 돌아오고 행복을 일군지 25, 디엔증의 당에도 단감자가 자라고, 벼가 푸르고, 수확을 이루고, 바다와 강에는 생선과 새우도 풍부하다. 당이 길을 이끌어가고 황량한 벌판을 개척해나갔다.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우리는 인도적인 인의로 고향의 발전과 협력을 열어갈 것이다. 이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양민학살을 기억할 것이다.


                                      당지구 정권과 디엔증 주민들이 바칩니다.
                                                              경신년 가을 8월
하미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전문이다

 

.
 

베트남 중부 지방의 여느 위령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조선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다 라는 말이 빠져 있다는 것과, 희생자의 이름 옆에 나이 대신 출생연도가 적혀있다는 것이다. 1880년부터 1968년까지 골고루 기록되어 있는 출생연대, 한 살에서 88세까지의 사람들이 같은 날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이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경이었어요. 7-8시 경에 호이안 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이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는 않았을거야. 그런데 갑자기 한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후…비명과 총소리,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팜티호아)

 

136명의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20명의 생존자가 부상을 당한 채 살아남았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한국군은 집단 사살 직후 다시 불도저를 끌고 와 시신이 널려 있던 현장을 깔아뭉갰다. 이미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시신들은 다시 한 번 짓뭉개지고 형체도 알 수 없을 지경으로 찢어졌다. 흩어진 살점, 부러진 뼈들을 수습하며 이들은 30여 년 동안 한국군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을 새기고 있었다.

 

 

 

2. 퐁니마을  :  11기 진료단 답사

Tinh Quang Nam, Huyen Dien Ban, Xa Dien Tho Thon Phong Nhi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터사 퐁니마을

      학살이 일어난 날 : 1968년 1월 14일(음력)

 

 파월 한국군 전사 기록 : 청룡여단은 1968년 1월 30일부터 2월 29일까지 여단 규모로 이른바 ‘괴룡 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구정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청룡여단의 주둔지 호이안 시내는 물론 디엔반현 등을 공격하자 전 여단이 나서 베트콩 수색 소탕전을 시작한 것이다.
1968년 2월 12일(음 1월 14일) 제 1중대는 오전 6시 15분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녓마을에 진입하였다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1시 5분에 중대의 선두부대는 목표(퐁니마을)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서쪽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하여 제압할 수 있었으나 중대는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참전군인의 증언 : 퐁니촌은 안전마을이었다. 게다가 미행병대와 자매결연을 맺기까지 한 마을이었다. 그날 1중대는 1,2,3 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퐁니촌 측면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개 병력쪽을 향해 사격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명이 총에 맞아 부상한 듯 했다. 중대장은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 베트콩은 이미 자취를 감춘 듯 했다.
 

 마을 주민의 증언 : "1968년 음력 1월 14일이었다.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침밥을 먹고 난 후였다. 한국군이 1번 국도를 따라 행군을 하는데 부비트랩이 터졌다. 한국군대는 행군을 멈추고 당산나무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국군 중에 부상이 있었던 듯하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2개 지점에 사람을 모아 집단학살했고, 집에 숨어있던 사람은 그 자리서 죽이고 집은 불태웠다. 시신을 수습조차 못했다. 전 가족이 몰살당한 집도 있었다. 아이들 주검은 상자나 대바구니에, 어른들 주검은 커다란 채반에 담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고 또는 끌면서 이 길을 걸었다 마을은 깡그리 불타고, 담요나 해먹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1968 년 1월 14일(음력) , 당시 두 명의 누나와 네 명의 조카를 잃은 응웬수(71)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한국군들이 물러가고 난 뒤,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들쳐 메고 길게 열을 지어 키엠루 초소를 찾아갔어. 만장도 없고, 그 흔한 눈물도 없고, 다들 넋이 나가 곡성도 풀어놓질 못했지." 또 다른 생존자 쩐 티 득 할머니(72)의 증언이다.
1968년 1월 14일(음력), 퐁니 마을에서는  주민들은 남베트남 정부군 초소 앞 도로 양옆으로 시신을 늘어놓고 청룡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다. 그러나 초소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파리 떼가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무렵에야 초소 군인들이 빗장을 열고, 장례에 쓸 널빤지와 천을 내주며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미 부패해 진물이 줄줄 흐르는 주검은 다시 마을로 옮겨지지 못하고 도로변에 그대로 묻혔다.

 

사건이 일어난 1년 후인 1969년 2월, 사이공의 하원 의장 앞으로 보낸  퐁니촌 주민들의 청원서. 베트남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직접 기록한 것.

 

 

존경하는 의장님
 

우리는 1968년 2월 12일, 꾸앙남 성, 디엔반 현, 퐁넛의 두 개의 마을과 퐁니, 탄-퐁 마을의 주민들로서 한국군에 의해 살해를 당한 35가구 가족들의 친척들입니다.
우리는 퐁넛의 두 개의 마을과 퐁니의 사람들로,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계속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35가구 가족들의 문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존경하는 의장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68 년 2월 12일 9시까지 우리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었고, 남베트남 정부에 복무하는 군인이 있는, 혹은 남베트남 정부에 복무하다 죽은 군인의 가족이었으며,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직 젖을 떼지도 않은 어린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들로서 CVN 통제지역하에서 매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우리 친척들은 모두 합당한 시민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국군 부대가 디엔반 현에 주둔하였고, 그들은 우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고 총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가족들의 몸을 자르는 등 야만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한국군 부대는 사체를 그대로 두거나 숨기고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 사건 이후 당시 지역책임자였던 호앙 쭝(Hoang Trung) 소령이 이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잔인하게 희생당한 상태로 있는 희생자의 사진을 찍고 희생자들을 묻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온순하고, 참혹하고, 지식도 없고, 힘도 없는 우리들은 찢어진 옷조각들로 덮힌 낮은 무덤을 매일 찾았고 애도하였습니다. 그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힘들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과거 학살이 일어났던 날인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부모님, 남편, 아내, 아이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아, 슬픔이여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4000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 불행한 희생자에 대해서 어떠한 단체도 조금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이 요구를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관인 국회(입법부)의 의장님께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장님께서 한국군과 베트남 정부가 개입하여 다른 유사한 사건에서 적용가능한 규칙에 따라 배상해 주기를 정중하게 요구합니다. 감사합니다

.
1969 년 2월 퐁니 주민 대표

 

3. 빈영마을  : 10기, 11기 진료단 답사

 Tinh Quang Nam, Huyen Thang Binh, Xa Binh Duong

 

빈영사는 꽝남성 탕빈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인구는 7,300여명에 이른다. 총 7개의 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농업과 어업이 주 수입원을 이루고 있다.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며 우기 시에는 바닷물에 잠길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며 태풍의 피해도 많다. 그러나 건기 시에는 물이 부족할 정도로 건조하여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환경으로 농토가 척박하며 벼농사와 함께 가뭄에 강한 고구마를 주로 심고 있다. 현재 빈영사에는 유치원이 하나 있으며 초등학교 다섯 개, 중학교 하나가 있다. 자연환경이 좋지 않아 경제가 크게 발전한 지역이 아니며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이다

 

빈영사는 북위 17도선 이남에 위치하여 있지만 해방지역이었으며 유난히 투쟁이 격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이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빈영사 부주석 팜푹션의 말에 의하면 ‘빈영사는 베트남정부에게 영웅사로 두 번이나 지정되어 상을 받았을 정도로 격렬하게 투쟁을 하였던 지역이다. 당시 빈영사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 전쟁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가족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전쟁에 직접 참여했으며 피해를 입었다.’ 이는 게릴라 전쟁을 치열하게 전개한 빈영사 지역이 남베트남, 한국, 미국이 상당한 부담을 주는 지역이었리라 생각되며 전술적으로도 꼭 완전 점령을 하여 통제 할 지역으로 간주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빈영사 학살 사건은 1969년 10월 2일(음력) 저녁의 폭격부터 시작되었다. 폭격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새벽 4시경 마을에 기름을 뿌려 숲을 태워 버린 후 헬리콥터로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 왔다. 당시 마을에 들어온 헬기는 20여대 정도였으며 헬기한대에 12명 군인들이 탑승 하였다. 마을에 진입한 한국군(청룡부대로 생각 됨)은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여 마을 사람들을 마을 언덕에 모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73명의 주민을 학살 하였다.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은 7일된 어린아이로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총탄을 피할 수 있었으며 도망가 있던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여 아기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빈영사에서 살면서 유격대원 활동을 한 레탕레이의 말에 의하면 ‘학살이 이루어진 후 한국군은 Truong Ton이란 지역에 주둔하며 3~5일 마다 마을에 들어와서 수색 활동을 하였다. 마을에 들어 올 때 마다 약탈 및 방화를 일삼아 오두막처럼 임시거처를 만들어서 기거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게릴라 전쟁이었다. 낮에는 농사를 짓던 사람 저녁이 되면 무장하여 유격대원이 되어 전투를 수행했으며 마을에 유격대원이 머물면 주민들은 유격대원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에 남베트남군과 한미 연합군은 주민들과 유격대원을 분리하는 정책을 펴려고 했으나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리 쉬운 정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당시 유격대원이었던 레탕레이(Le Thanh Nghi)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한국군의 마을 민간인 학살을 지켜보며 전투를 하려고 했으나 유격대원의 숫자가 너무 적어 어쩔 수 없었다.‘ 말은 이 지역의 유격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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