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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기(2012년)탄타오시인대담.JPG

 

 

 

[날짜 등 표기 필요]

 

 

 

 

이도연

 

저는 오늘 탄타오 시인과의 대담에서 사회를 맡은 이성오구요,

매년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평연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해주셔서 좋은 말씀 해주시거든요. 피곤하시더라도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할머니도 보고 위령비도 보고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마음에 와닿을 수도 있을텐데요.

오늘 순서는, 제가 탄타오 시인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드리고, 시 낭송이 있고, 그 다음에 저희의 답시 낭송이 있고, 본 행사로서 탄타오 시인과의 질문과 답변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 이후에 저희가 준비한 행사와 선물교환이 있겠습니다.

제 13기 진료단 탄타오 시인과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정보 기자로서 활동하셨고, 미라이에서 태어나셨고, 최고의 군인상을 수상하셨고, 최고의 베트남 군인에게 수여되는 두 상을 동시에 받은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황무지에서 희망이 싹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평연과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하고 계십니다. 탄타오 시인의 간단한 인사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시인

친애하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친구분들께 정중한 인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일년에 한 번씩은 한국의 의사선생님들을 만나는데, 이번에 보니까 이번 진료단 분들은 젊으신 것 같습니다.  송필경 선생님도 젊으시다고 하시네요. (와우~ 환호성)

 

이: 제가 들은 인사말 중 제일 짧은 인사말이었습니다.

앞에 통역하시는 분 잘 모르시죠? 처음 오시는 분들은 잘 모르실 테니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희가 베트남 온 목적인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처음으로 밝히신 분이고, 모든 활동에 항상 도움을 주시고, 저희가 갔던 모든 곳들은 구수정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구:  이렇게 썰렁한 소개는 처음 받아봅니다.

 

이 : 오늘이 미라이 위령제였다고 합니다. 혹시 보셨나요? (네~) 아까 시인 소개에서 처음 등단한 시가 ‘미라이의 아이들’이란 시였는데, 그 시를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시인 : 다시 한 번 저희 꽝아이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은 꽝아이 성의 가장 중요한 날인 오늘 여기를 방문하셨습니다. 오늘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날인데 세계에서는 미라이라고 부르고 베트남에서는 선미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미라이학살 4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꽝아이성은 세계적으로나 베트남에서나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고 미라이 학살로 유명합니다. 우리들에게는 가장 큰 상처였던 미라이가 꽝아이를 유명한 고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이 이 미라이를, 이 꽝아이성을 유명한 고장으로 만든 거죠. 저는 이 미라이의 아이들이라는 시를 미라이 30주년이 되던 해에 썼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직후 폐허가 된 미라이에 한 달 반 정도 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주민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내가 미라이에 있었던 그 시간의 결과물이 이 장편 서사시입니다. 이 시는 미라이의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바치는 제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1998년은 미라이 학살의 30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박물관에서 보셨겠지만, 톰슨 중위 기억하십니까?(네~) 미라이 학살 당시에 미라이 상공 위를 날고 있던 조종사였죠. 톰슨 중위가 상공에서 아리를 내려 본 광경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었죠. 위험한 상황이었겠지만 동료에게 엄호를 부탁하고 헬기를 착륙시킵니다. 학살이 끝나던 막바지였는데 열 명의 주민을 구하게 됩니다. 30주년이 되던 해에 톰슨 중위가 미라이에 방문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답례로, 베트남 방송에서 8시, 황금시간대에 탄타오 시인의 ‘미라이의 아이들’이라는 장편 서사시집을 낭송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지금까지 유명한 시들도 황금시간대에 긴 서사시를 낭송하는 일은 없었는데,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0주년에 미라이를 방문해준 선한 미국인들에 대한 답례였습니다. 1998년은 미라이  학살 30주년인, 선미지역의 중요한 해였기도 하지만, 선미 지역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학살이 가져오는 이 지역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사건 같아요. 1997년에 탄타오 시인이 방문했던 시기에도 선미지역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탄타오 시인이 이 상황을 보고 ‘미라이에 필요한 위령비, 그것은 전기다’라는 기사를 쓰셨습니다. 이 기사를 계기로 ‘청년지’라는 곳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1998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44주년이 된 올해 이 미라이 박물관을 방문하셨는데요, 제가 76년에 처음 미라이에 가서 만났던 아이들은 이제 중년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보신 미라이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미라이를 자주 방문하는데 여전히 주민들은 가난하고 피폐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학살 이후에 학살을 극복하는 과정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고, 주민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트남 정부에서는 미라이가 있는 싸에 영웅지역이라는 호칭을 두 번이나 하사했지만 그럼에도 이 지역은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미라이 44주년을 기념해서 제가 썼던 ‘미라이의 아이들’이라는 장편 서사시의 일부를 낭송해 드리려 합니다.  ‘망루에서의 호소’ 이것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향한 외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 낭송)

 

구 : 제가 시인처럼 읽을 수는 없지만… 제가 예전에 시인의 시를 번역했는데 탄타오 시인의 시를 절반 정도밖에 담지 못한 것 같네요.

 

<망루에서의 호소>

바다 쪽에서 달무리가 떠오른다. 마을 쪽에서 어린 아이들이 날아오른다. 달과 아이들이 만난다. 하늘 가운데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둥근달아 이리 날아와 놀자…….

….. 바다와 대지의 아이들로 우리는 이곳에서 자라났고, 이곳에서 자라날 것이다…….

…….이 아이가 내게 오는 총탄을 막아주었다. 이른 아침 내가 선미에 다다르기 전에. 이 아이가 나에게 오는 총탄을 막아주었다….. 이 아이가 우리의 총탄을 막아주었다. 이 여리고 마른 가슴팍으로 …

………..다함께 모두 모든 사람의 풍요를 노래하자. 이 공간에 새기자, ………….. 밀물처럼 깊이 새기자 우리는 여전히 모두 살아 있노라고……………

ㅠㅠ  시 낭송 했습니다……….

 

 

이 : 저희가 항상 시 낭송을 듣기만 하다가 두 시간 전에 답시를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준비했습니다. 제목은 ‘하미에서’라는 시예요. 진료단 내에서 한 분이 나오셔서 낭송해주시겠습니다. 김유경 선생님이 낭송해 주시겠습니다.

 

 

시 낭송

<하미에서> - 이 승철

그 날 파도들이 저 멀리 수평선을 타고 새하얀 물갈퀴를 세우며 나에게 달아오고 있었다. 푸르딩딩한 잉크빛 하미바다. 은빛 모래알을 끊임없이 출렁이며 다가오던 하미 앞바다. ……….그날 나는 맹세도 서른 번씩 하면서 누구라도 붙잡고 ………….아비규환의 그 외침들에게도. 그 날 아침 하미 마을의 인민들은 따이한 군인들의 말을 듣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집결하였다. 그들이 모두 모이자 평상시 그토곡 다정하던 남조선 군인들이 엠식스틴을 ………..삽시간에 핏빛에 젖어 잡처럼 짐승처럼 널부러져 나뒹굴었다.  …………….그 쭈글쭈글한 잔주름에 파인 아우성 소리가 …….이내 고요히 멎어버렸다. 아, 서글서글한 눈매에 가득 맺히던 …………….저 멀리 하미의 수평선을 끝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 날 우리는 추모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일백 삼십 육명의 이름자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우리 또한 남조선이라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끝내 헛헛한 마음뿐이었다. 땡볕아래 서성이는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하미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하미 마을의 , 그 오솔길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늑한 수평선 물가의….개의 발자국까지 …..사랑스럽고 아름답던 하미였다.

 

 

구 : 하미 바다 가보신분 계시죠? 우리는 오늘 하미바다에 못간 대신 미케 바다에 다녀왔습니다. 그 느낌이 하미 바다와 비슷하지 않았나요?

 

이 : 오늘 하미 마을 갔던 장면들이 잘 떠오르고, 이번이 하미마을에 가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시 낭송을 맡아서 짧은 시간 연습하시고 낭송하신 김유경 선생님께 박수(짝짝짝)  이제 질문답변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동안 진료단이 중간에 조를 나눠서 답사하고, 그 과정에서 왜 우리가 여기에 진료를 왔는지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오늘 그 과정을 한꺼번에 했습니다. 생각 못하다가 갑자기 생각하게 된 분도 계실 거예요. 아까 그 할머니라든지, 하미마을이라든지, 여러가지…  

 

구 : 베트남 친구들도 베트남어로 질문해주셔도 됩니다. 탄타오 시인을 만나는 기회가 흔친 않잖아요? 아니면 오늘 느꼈던 이야기를 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박찬일 : 한국에서 온 학생 박찬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미마을과 선미마을을 갔는데 그 때 보았던 것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고 한국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많이 느끼고 갑니다. 그런데 위령비가 한국인, 영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베트남 정부에서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입장 등을 듣지 못했던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이 궁금합니다.

 

구 : 선미 지역의 위령비는 베트남 분이 세우신 거고 빈호아 지역에는 영국인이 세운 위령비, 베트남인이 세운 한국군 증오비, 베트남인이 세운 열사의 비가 있어요. 질문의 취지는 이렇게 많은 위령비들이 있고, 한국인, 영국인 베트남 인들이 위령비를 세웠는데 베트남 정부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이죠?  (네)

 

시인 : 여러분이 오늘 다녀보셨겠지만 베트남 전쟁 기간 중에 한국인에 의한 많은 민간인 학살이 저희 지역에서 자행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눈으로 확인했듯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숨길 이유도 없고, 숨기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베트남 정부도, 베트남의  많은 사람들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오늘 보신 곳 이외에도 중부 각 지역에 많은 위령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오늘날의 미라이 학살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한국군 학살만 해결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2일 전입니다. 정확히는 1988년 3월 14일 중국과의 영토분쟁이 있는 지역이 있는데, 그 섬에서 베트남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군인들이 중국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24년이 되었음에도 베트남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중국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은데요, 주민들의 자발적인 위령비 건립도 없었고, 다만 인터넷 상에서 암암리에 이 날을 기리고, 이 날 희생되었던 64명을 기리는 인터넷 상의 열비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듯 베트남인들에게는 가슴 속 깊이 파묻어두어야만 했던 많은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묻어두고 있다고 해서 과거를 잊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꺼우 : 저는 오늘 탄타오 시인을 두 번째 뵈었습니다. 저보다 어린 후배들은 탄타오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만났는데 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시를 저도 알고 있고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미라이에 대한 시를 썼는지요? 그 이후로 이 지역에 대한 또 다른 시를 쓰신 적 있나요?

 

시인 : 제가 미라이의 아이들에게 주목했던 시기는 전쟁이 막 끝난 직후였습니다. 어른들도 굉장히 힘든 시기에 아이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그런데 배를 곯고 어려운 시기를 사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는 미라이의 폐허에서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이 이 세계를 바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모든 인간을 설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아이들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주목하고 있고, 아이들에 대한 시를 쓰고 있습니다.

 

비 : 저는 지금 대학 3학년입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의 시를 배웠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1975년 이후에 전쟁 직후에 전쟁의 고통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데요. 제가 배웠던 시가  롯가의 기타음악 이런 시에요 (롯까 : 스페인의 대시인) 그런 시를 제가 읽었는데, 이 시도 1979년에 지어진 시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전쟁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시로 알고 있는데, 이런 시를 쓰는 동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시인 : 예 맞습니다. 제가 이 시를 썼던 게 1979년이었고요, 이 시는 제 창작인생에 있어서 전쟁의 영향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이 시기에 그렸던 시는 전쟁의 참혹함, 참혹함을 견뎌내는 인간, 죽음 등이었어요. ‘페르코 가사르카’ (스페인의 대시인) 페르코 가사르카가 파시스트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참혹함을 담은 시였습니다. 내용은 참혹하지만 시어는 아름다운 시였는데요, 이 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였습니다. 전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긍정적 영향도 있고 부정적 영향도 있지만 전쟁이 제 시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심희준 : 저는 한국에서 온 한의사고요, 심희준 이라고 합니다. 베트남에 와서 느꼈던 게 베트남이란 한국이랑 많은 것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음식문화, 놀이문화 등이 비슷했는데, 역사적으로도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두 번의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여기도 그랬고, 학살도 비슷하더라고요. 제주도 4.3 항쟁의 묘를 본 적 있는데 거기는 한 마을 사람들이 다 죽임을 당했고 하나의 묘를 만들어서 사망자가 다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내는 묘가 지금도 있고요. 그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려 합니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친한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가지로 의견이 갈리는데요. 한쪽에서는 지어서 국방을 강화해야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실질적인 미군기지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알고 계신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구 : 탄타오 시인은 제주도도 여러 번 방문하셨고, 제주도에 대하여 베트남에 기사를 쓰기도 하셨습니다. 제주의 역사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제주가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인에게 통역)

 

구 : 알고 있으시다네요.

 

시인 : 저는 제주를 두 번이나 다녀왔고 특히 2008년에는 제주 4.3 위령제를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섬이고,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섬입니다. 제주를 보면 ‘리솜’이라는 섬이 생각납니다. 제주에는 해녀들이 있는데 리솜에도 해녀들이 있습니다. 제주와 리솜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정부가 아마도 어떤 군사적 전략적 가치가 있어서 해군기지를 만들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제주가 군사기지가 아닌 다른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민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 국민들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주가 영원히 평화의 섬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주가 많은 아픔을 안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평화의 섬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주는 전 세계에 열려있는 섬입니다. 세계인들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곳인데요, 이런 곳에 군사기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매우 많은 외국인들이 다녀가는 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체를 방문했던 외국인 수보다도 많은 수가 제주를 방문 한거죠. 그렇기에 앞으로도 군사기지보다는 전세계인에게 열려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송필경 : 2001년에 베트남을 처음 왔고 이틀 뒤에 탄타오 선생님과 한 전투지역을 찾았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김영만 선생님이라고.. 그 분이 희생자들 앞에서 눈물로 사죄하는 현장을 찾아주셨습니다. 매번 탄타오 선생님은 주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보다 훨씬 넓고 세계적인 안목으로 제주를 보고 계십니다. 그동안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선생님이 느끼시는 호치민과, 제가 느끼는 호치민은 베트남의 모든 정책과 이런 것들이 호치민의 등 뒤로 숨어서 행해지고 호치민의 이름을 너무 남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인 : 베트남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알듯이, 베트남 인민, 지식인들은 호치민 주석에 대하여 위대한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호야 아저씨’라고 부르는데요, 그는 애국자고 민족주의자였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전 생애를 바치신 분입니다. 호치민의 등 뒤에 숨어서 인민을 통치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일이죠. 그러나 호치민은 그들처럼 인민을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걸 원치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호치민은 민주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호치민에게 민주주의 사상은 20세에 프랑스에 건너가면서 발아하게 되었는데요, 프랑스 사회주의를 접하기 전까지 베트남에서 발아했던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입니다. 호치민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시기에서도 인민을 위하는 시기였는데요, 그래서 저는 호치민이 인민을 통제, 지배하는 독재와는 달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호치민이 원했던 건 그런 방식으로 인민을 통치하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이 :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그런 부분에 대하여 질문이 들어옵니다. 그런 큰 틀에서 생각을 하시고 질문을 해주세요.

 

김은희 : 저는 한국에서 온 학생 김은희라고 합니다. 우선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시 들려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오늘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으신 할머니와 아드님을 찾아뵈었는데, 할머니의 잘려나간 발목과 아프신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그 아드님을 보고도 마음이 아팠어요. 그 아프신 할머니를 보고 마음 아파하는 베트남 친구들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제가 던진 수류탄이 아니지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30여년의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이 더 지났지만, 전쟁의 아픔이 남아서 풀리지 못한 매듭이 많은 것 같은데, 그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은 젊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겪진 못했지만 그 매듭을 풀어야 할 젊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 지금 들려주신 말씀의 진정성, 진심어린 말씀에 감동 받았습니다. 나는 베트남이든 한국의 젊은이든, 젊은이들에게는 그럴만한 가능성도 잇고 그런 의무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들이야말로, 베트남과 한국의 진정한 화해, 진정한 다리, 를 놓을 수 있는 세대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세대라고 젊은이들을 바라봅니다. 여러분들은 단순히 오늘 목격자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이 오늘 목격자로써 이 걸 또한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라이 학살에서 진두지휘를 했던 켈리중위가 40여년 만에 최초로 작년에 사과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픔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켈리 중위의 양심이 움직였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참전한 당사자도 아니고, 죄악을 짓지도 않았지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세대는 지나간 상처를 지워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쟁 기간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전후세대이지만 여러분이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만들어갈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만약 다른 질문이 없다면 오늘 이 마지막 질문이 오늘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으면 좋겠고 여러분과 나 사이의 서약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전쟁의 상처도 닦아주어야 하고 불행했던 과거를 극복해야 하고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진정한 우애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이 : 질문은 이정도로 마치고, 탄타오 시인에게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홍수연 선생님께서 탄타오 선생님께 드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2001년도 우리가 왔을 때 탄타오 시인이 불렀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노래)

 

 

이 :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고요, 저희가 선생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증정식을 가지고, 단체사진을 찍을 테니까 나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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