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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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7년 3월 5일(일) 16:00

장소 : 탄 아주머니댁

진행 : 권현우

기록 : 이효직

 

권현우

탄아주머니도 베트남 평연과 여러번의 만남을 가져서 몇 분 이제 낯이 익은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송정록 선생님을 가리키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네요. 혹시 몇 년 전에 탄 아주머니 만났었다 이런 분 계시나요. 탄 아주머니 저 좀 알아봐주세요. 기억나시는 분 계신가요. 탄 아주머니 만났었다. 혹시 안 계세요. (김용주 선생님 알아보시고) 방긋 웃으시네요. 아주머니께서 오늘 절 보시고 얼마 전에 본인이 치료를 받았는데 그게 아직 회복이 덜 됐어. 지금 머리도 좀 아프고 몸이 많이 무겁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기침도 하시고,,

 

오늘 우리 집에 이렇게 찾아 준 베트남 평연 여러분, 그리고 베트남 학생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까 정말로 반갑네요.

 

권현우

연락드렸을 때 굉장히 반가워 하셨어요. 거의 이 시기에 평연이 방문하는데요. 근데 오늘 몸 상태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분위기 바꾸는 차원에서 가수 한 분이 저희에게 노래 준비했으니까 적당한 시간 달라고 하셨거든요. 김용주 선생님께서 아주머니께 노래 한 곡 들려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노래 제목은 오월의 노래라고 합니다. 저희가 분위기를 조금 푸는 의미에서 선생님 노래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한 번 노래들어 볼까요

 

김용주

제가 베트남을 온 게 네 번째인데요. 탄 아주머니나 함께 돌아가신 할머님 뵙고 어떤 이야기들을 듣는 데, 사실은 직접적인 저의 이야기를 전할 길은 없더라구요. 근데 이제 노래가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용주

이 노래는 오월의 노래라고 하는데요. 베트남 전쟁 당시에 참혹한 학살이 있었는데 그 때 참전했던 군인들이 또 우리 한국에 와서 한 도시를 무참하게 학살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학살된 이들을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김용주 선생님 노래)

(전체 박수)

 

예전에 한 신부님 만났을 때 그 이야기 들었어요. 오월이야기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거 베트남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권현우

이제 탄 아주머니와의 이야기 해봐야 될 것 같은데요. 보통은 저희가 증언을 뭐 바로 부탁드릴 때가 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때도 있는데 오늘은 바로 그 날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보다 여러분들 오늘 답사일정을 하시면서 생존자분을 만나신 거잖아요. 혹시 아주머니께 질문도 좋고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주고 받다가 증언을 좀 들려달라고 요청을 해보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탄 아주머니께 인사라도 드려도 좋구요. 어떤 분이 오늘 이야기의 포문을 열어봐 주시겠습니까. 인사 한 번 건내시고 싶은 분

 

오늘 내가 몸도 되게 안 좋고 한데 이 친구가 기타들고 와서 노래선물을 해 주니까 내가 참 기뻐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한테 호치민 주석 호 아저씨에 관련된 노래 한 곡 들려줘볼까요

 

(전체 박수)

 

권현우

이 노래는 전쟁 끝났을 때 75년 4월 30일 끝났을 때 승리의 기쁨을 노래한 노래구요. 굉장히 유명한 노래고 아마 아시는 분들 계실 겁니다. ‘대승리의 기쁜 날 호아저씨가 있는 것처럼’ 이란 노랜데요. 한 번 탄 아주머니 노래 박수로 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박수)

 

오늘 우리 베트남 학생들도 왔는데 아주머니가 노래하면 우리 친구들도 같이 해줄거죠

 

(탄 아주머니, 베트남 학생들 노래)

 

(전체 박수)

 

권현우

이제 노래도 오고 갔고 이제 아주머니께 뭐 질문 서로 이야기 나누기 전에 우선은 보통은 아주머니께 증언을 조금 부탁드리면 어렵지만 증언을 조금 해 주시는데 오늘은 몸 상태도 되게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아주머니의 학살 이야기는 제가 간략하게 해 드리고 뒤에 이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간단하게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1968년 2월 12일 있었던 학살이었는데요. 그 때 탄 아주머니는 8살이었습니다. 정말 나이가 어렸었죠. 8살이었는데 그 때 이제 아주머니 가족중에는 학살 일어나기 2년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구요. 어머니가 오빠, 언니, 탄 아주머니, 남동생을 이렇게 키우고 있었어요. 근데 어머니는 저쪽 시장에서 일을 하셨었는데 되게 부지런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셨고 그리고 집에서도 조그만 잡화점 같은 걸 운영하셨는데 사탕같은 거 팔고 여러 가지 생활제품들 같은 거 팔고 그러셔서 어머니를 낮에는 거의 볼 수 없었고 대신에 이모가 탄 아주머니 형제분들을 돌봐 주셨어요. 그 날도 이제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장을 갔고 그리고 이모도 10개월 된 자기 아들이 있었어요. 그 아이를 데리고 이제 탄 아주머니네로 왔죠.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놀고 있었는데 아침 8시경인가 갑자기 총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모가 방공호로 숨자고 해서 숨었어요. 그런데 사실 방공호에 숨는 것이 베트남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죠. 폭격이 있어도 숨고 하니까. 오늘도 그냥 방공호에 잘 숨어 있으면 잘 지나가겠거니 했는데 30분 정도 됐는데 한국군들이 집으로 들어와서 방공호를 찾은 거에요. 그래서 수류탄 같은 걸 보여주면서 나와라 안 나오면 던진다 손으로 시늉을 하면서. 그래서 이모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다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근데 사람들이 다 올라나오자마자 총을 쏘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오빠가 막 도망가다가 총을 맞았는데 엉덩이가 날아갔나 아마 그랬을 거에요. 그래서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고 탄 아주머니는 왼쪽 배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쓰러져 있고. 그리고 다섯 살 난 그 남동생 아이는 한국군이 입에 총을 쐈어요. 입 전체가 다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총상을 입고 남동생을 봤을 때 피를 막 게워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이모는 어떻게 됐었냐. 이모는 그 때 총을 맞지 않은 상태였어요. 근데 그 이모가 갑자기 한국군이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할 때 그걸 저지하기 위해 한국군의 손을 딱 잡았어요. 그러니까 한국군이 대검으로 이모를 죽이고 그 10개월 된 아기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한국군이 지나갔는데 아주머니는 총상은 입었지만 걸어갈 수는 있는 상태였었고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까 남동생은 피를 철철 흘렸고 오빠는 굉장히 중상의 상태로 있었어요. 근데 아주머니는 걸을 수 있어서 남동생한테 갔는데 우물가에서 남동생이 쓰러져 있었는데 남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에요. 얘를 안고 가야 하는지 업고 가야 하는지. 피는 철철 흘리고 있고. 그래서 이제 오빠한테 갔어요. 오빠도 제정신이 아니죠. 근데 오빠가 엄마한테 가야 돼. 저 남동생 살릴려면 엄마한테 가야 돼. 엄마를 찾으면 남동생 살릴 수 있을거야 라고 얘기해서 탄 아주머니랑 오빠 두 사람이 엄마를 찾아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근데 아주머니는 겨우겨우 걸을 수 있었는데 오빠는 걸을 수 없어서 거의 기다시피 걸어가는 오빠를 탄 아주머니가 끌고 간거에요 엄마를 찾아서, 엄마를 찾아서 이제 가는데 한국군이 어느 집앞에서 서있는데 못들어가고 있는거에요. 딱 봤더니 물소 한 마리가 그 집앞을 막고 있더랍니다. 총도 쏘고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도 물소가 비키지를 않더래요. 그게 이제 이 마을에서 물소가 지켜준 집이라고 해서 그 물소가 지켜준 덕분에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국군이 그 집을 습격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보고 아주머니와 오빠가 그 집안으로 들어가 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방공호에 있던 주민들이 살아있었어요. 근데 그 방공호에 살아있던 주민들한테 한국군 갔어요 라고 말했더니 나올 엄두를 못 내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얘기가 야야야 내가 너희 엄마를 봤어. 너희 어머니가 원래가던 시장을 안 갔어. 저쪽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갔어. 이렇게 말 하더래요. 그래서 어머니가 살아 있겠구나. 엄마를 내가 찾아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었죠. 그때 또 아주머니께서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는데 또 목이 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을 벌컥벑컥 마셨는데 마시니까 창자가 막 튀어 나오더래요.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거죠. 그렇게 물을 마시는게. 그러니까 탄 아주머니가 물을 막 벌컥벌컥 마시니까 오빠가 나도 물을 좀 달라고 했는데 마침 아주머니가 그때 물을 다 마셔서 오빠한테 줄게 없었어요. 아주머니 생각에 그때 만약 오빠가 물을 마셨으면 오빤 죽었을거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았으니까. 그런식으로 두 남매가 헤메다가 결국엔 이제 논두렁이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데 오빠가 더 중상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오빠를 먼저 후송을 하게 되고 오빠가 이제 혼자 끌려가니까 여동생을 찾은거죠. 그래서 이제 탄 아주머니도 함께 후송이 되어서 생존자로 살아남게 되었습나다. 중상이었던 오빠는 다낭에서 치료가 잘 안 돼서 더 좋은 여러 병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으셨고 아주머니는 1개월인가 2개월정도 입원 하시면서 중상을 극복하고 그때부터 고아로 살게 되셨는데,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거잖아요. 형제 자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그때 이제 막 9살때부터 큰 아버지댁에 얹혀 살았는데 그때부터 온갖 잡일들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생고생을 하신거죠. 아이돌보는 일들이 너무 힘들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셨대요. 그리고 어머니는 왜 나를 두고 먼저 가셨을까 어머니 원망도 굉장히 많이 했었고. 아까 제가 한겨레21에서 사진 얘기 썼었다고 했었죠. 본 상병이 찍은 사진을 갖고 한겨레 기자가 찾아오자 주민들이 그걸 다 기억했다고. 근데 그때 그 사진속에 탄 아주머니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엄마의 사진도 있었어요. 35년만에 탄 아주머니도 그 사진을 보게 된거죠. 근데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 탄 아주머니는 자기 엄마가 마을에서 죽었는지 어디에서 죽었는지 몰랐어요. 근데 그 사진을 보고 이제 안거죠. 아 그때 내가 지나쳤던 어딘가에서 막 마을을 헤맸었던 말이에요. 논두렁 이런데를. 그때 내가 엄마를 지나쳤구나. 그 시체더미 어딘가에서 내가 엄마를 지나쳤구나 하면서 막 통곡을 하셨었대요. 그때 내가 엄마를 발견을 했더라면 그때 엄마가 안 돌아가셨더라면 그때 내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왜 못 찾았을까 탄 아주머니께서 그 흑백필름의 사진을 보면서 통곡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게 나름의 한이죠. 어머니 돌아가신 게 탄 아주머니의 탓은 아니지만 탄 아주머니 인생의 크나큰 한입니다. 그리고 탄 아주머니께 한 번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봤는데 이쪽에 보면 학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 남동생을 모신 재단이 있어요. 이런 재단은 베트남에 어느 집이나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어릴 때 너무나 힘들게 살았고 이제 집이 좀 있고 아이들 결혼 시키고 살고 있는데 지금 내 인생의 의미는 우리 어머니, 내 언니, 내 남동생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는 거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세 명의 무덤을 지었는데 돈이 없어서 너무 볼품없이 지은 무덤이었어. 그 무덤을 좀 번듯하게 지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내 마지막 임무야. 사명이라고 생각해. 이 이야기를 한국단체 만날 때 마다 펑펑 우시면서 하셨었어요. 특히 무덤이야기. 무덤이 거의 다 쓰러져 간다. 새로 지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5년 정도 하셨었는데 무덤 만드는 돈이라는게 베트남이 사실 싸지가 않습니다. 감히 아주머니께 저희가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고 다른 지역에서 하는 사업도 많았고. 미뤄오고 미뤄오고 하다가 작년에 조화가 갑자기 많이 모였었어요. 위령제를 하겠습니다. 위령제에 조화를 보내주세요 하고 베트남 관련 단체, 개인 분들께 연락을 돌렸는데 평소보다 2, 3배의 조화가 모였었어요. 근데 그 조화를 베트남에서 허가문제와 한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많이 모인 130개의 조화를 다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탄 아주머니를 아는 단체 분들께 조화를 다 보낼 수 없는 상황이어서 보내주신 조화비를 탄 아주머니 가족 무덤 건립 기금으로 좀 돌리면 어떻겠습니까 해서 거기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고 베트남 평연에서도 참여를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설을 앞두고 가족 무덤을 번듯하게 지어서 굉장히 기뻐하셨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탄 아주머니께는 그 때의 기억이 아주 선명하십니다. 그리고 8살이었지만 기억이 필름으로 된 것처럼 하셨고 한국에 가서도 직접 증언을 하셨고 한국 단체도 많이 만났었고,, 근데 자꾸 저만 이야기 하게 되면 좀 그럴 것 같아서 방금 들었던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나 답변 같은 거 여러분들이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그래도 아주머니께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어떤 분이 이야기의 장을 열어봐 주실래요

 

이상미

질문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요. 기사를 보게 되면서 한국에서 아주머니가 왔을 때 용서를 빌기 바랐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 자기가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지금 상태로 해결이 되지 않고 지속이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로서는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게 어떤 마음일까에 대한 궁금함이 있습니다.

 

권현우

방금 질문해 주신 분이 말씀을 굉장히 덜덜 떨면서 질문을 하셨어요. 질문의 요지가 뭐였냐면 아주머니께서 한국에 갔을 때 참정 군인들에게 사과를 받는 걸 기대를 하셨는데 그렇지 못했단 말이죠. 그게 굉장한 충격이었을텐데 아주머니 심정이 어떠십니까 그 정도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에 갈 때 한 가지 바램이 있었어요. 참전 군인들을 만나면 참전 군인들이 생존자인 나한테 사과하는 거 그런 것들을 제가 생각하면서 한국에 갔었죠. 근데 현실은 정 반대였어요. 물론 저한테 사과를 했던 참전 군인도 있었습니다. 바로 스님이 기억에 남는데요. 그 스님이 저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었죠. 하지만 정말 많은 참전 군인들이 저희 두 사람을 반대를 했었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거짓말이다. 사기다. 그리고 8살인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을 하냐. 8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 저는 8살이었지만 그때의 일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참전 군인들은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학살이었어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그 사람들은 그걸 인정을 안 할 뿐인거죠. 정말 엄청난 상처가 제 몸에 있습니다. (왼쪽 배를 가리키며) 49년이 지났는데도 이 상처가 지워지지가 않아요. 지금도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때 참전 군인들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마음이 아프구요. 머리가 아프구요. 지금도 괴로운 심정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는 한국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었고 한국 사람들이 절 데려가서 병원에서 종합검진도 받게 해줬었고 정말 진심으로 챙겨줬었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참전 군인들의 그런 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그들이 어떤 행동들을 했는지도 잘 아실 거에요.

 

김현철

(앞부분은 소음으로 들리지 않음) 기회가 되면 다시 한국에 오실 의사가 있으신지 여쭤봐 주세요

 

한국에 기회가 되면 가고 싶어요. 한국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그때 나랑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얼굴 한 번 보고 애틋했던 시간 다시 갖고 싶고 그때 나 반대했었던 참전 군인들이 아직도 그러고 있는 지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런지, 변했는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요.

근데 여기 오셨는데, 이번에 여행같은 거 오신거에요 아니면 진료하러 오신거에요 아니면 어떤 걸로 오신거에요

 

임병묵

저는 일단 한국에서 한의사구요. 의료봉사하러 왔습니다. 근데 가슴 아픈 현장들을 보면서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뒷부분은 소음으로 들리지 않음)

 

왜 우리 동네에선 진료 안하나요. 하지만 이런 만남이 위로가 됩니다.

 

 

이상미

아까 전에 ‘한국인 친구들’이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아직 몸에 상처도 있고 마음의 증오도 있으신데 어떻게 그런 감정의 변화가 오셨나요

 

네 맞아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내가 어떻게 한국사람들이랑 친구가 될 수 있겠냐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처음에 한국 사람들만 생각하면 정말 증오에 가득찼었죠. 특히나 한국 남자를 만나면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어요. 제대로 쳐다 볼 수도 없었고 되게 무서웠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국 사람들을 만나는게 차츰 늘어나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게 됐어요. 한국 사람들중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구나. 그리고 이렇게 많이 있구나.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랑 점점 친해지게 되는 거에요. 인사들도 오고 학생들도 오고 선생님들도 오고, 이런 사람들이랑 자꾸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교류를 갖게 되고 추억을 갖게 되면서 시간이 쌓이게 되면서 점차 익숙해지는 면이 있었구요. 그리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게 그때 나 건강검진 받게 해 준거 그게 너무 고마웠었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준 선물, 나에게 줬던 그 뜨거웠던 사랑 그거를 내가 정말 잊을 수가 없을 거에요

 

김정미

최근에 즐거웠던 일은 없으셨나요

 

최근에 있었던 즐거운 일은 어머니 묘 다시 만든 거 그거고, 다른 일들은 그냥 그래요.

 

김용주

오빠는 아직 살아 계시나요, 살아 계시다면 자주 만나시는지

 

오빠가 며칠 전 제사 때 여기 퐁니에 왔었어요. 근데 오빠네가 정말 어려워요. 왜냐하면 오빠가 저보다 부상정도가 심각했거든요. 그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아내는 있지만 학살 후유증 때문에 아이는 없어요. 그래서 굉장히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우리 오빠가 제삿날만큼은 여기 꽝남성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하려고 참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오늘 베트남 학생들도 왔는데 이 이야기는 꼭 해야 겠어요. 내 인생, 오빠 인생에 대해서 내가 꼭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오빠랑 내 인생이 정말 비참하고 힘들었어요. 그때 오빠 14~15살 정도, 나 8살 그리고 남동생 5살 그런데 오빠랑 나 말고 다 죽었잖아요. 다 죽고 목숨만 겨우 겨우 살아서, 목숨 겨우 겨우 부지해서 이렇게 살았어요. 막 이제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매일이 힘들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 정말 막막했었고 오빠는 이 마을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면서 호치민시로 갔었죠. 그때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제가 한국군에 대한 증오심이 정말 많았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한국군은 왜 우리 엄마, 언니, 남동생 다 죽여 놓고 나는 살려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왜 한국군은 나는 안 죽였나. 그런 맘이 들 정도로 제 증오심이 한 때 너무 심했었어요.

 

김용진

한국에 조만간 대통령이 바뀔 것 같은데요. 새로운 한국 대통령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생각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한참 후) 저는 대통령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때 한국군이 와서 저질렀던 학살 인정해야 합니다. 참전 군인들이 또 인정해야 합니다. 이걸 꼭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당연히 사과도 받아야 하고

 

권현우

오늘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구요. 저희가 이제 가기전에 여러분들 예를 들어서 단장님만 선물 드리고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쑥 다 가버리면요 탄 아주머니 굉장히 서운해 하세요. 보통 이제 한국분들이 한 분 한 분 다 인사를 하고 가시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대원도 많으니까 그럴 수는 없을 테지만 최소한 10명 정도는 손 잡고 감사합니다 짧게 라도 인사 하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역단 학생들도 나와서 인사하구요.

 

오늘 여기 와주신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 너무 감사하구요 저를 응원해 주시고 지지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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