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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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8km, 추모와 기념 사이

-베트남의 전쟁 기억과 한국의 전쟁 기념

 

일시 : 2018년 2월 27일(화)

사회자 : 이성오(이하 이)

강사 : 구수정(이하 구)

기록 : 정선화

 

이: 안녕하세요, 저는 베트남의료평화연대 이사 이성오입니다. 제가 강의할까봐 긴장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 아니에요. 구수정 선생님 소개하고자 나왔는데, 먼저 준비한 것을 짧게 얘기하겠습니다. 소개할 때 송경동 선생님이 봉사란 말을 안 하신다고 했는데, 사실 평연은 공식적으로 봉사라고는 잘 말하지 않아요. 이유는 평연이 2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구성원의 정체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일시키지 않고 다같이 가고 있는 건데요, 처음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제로 만나고 그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집행부도 그렇고 이사들도 그렇고요. 그래서 구수정 선생님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강의가 중요합니다. 처음 조사하시고 제기하셨기 때문에요. 20년 가까이 평연 활동하면서 2014년도까지는 저희랑 같이 하셨어요. 베트남에서 현지 준비와 강연을 하셨는데 5년 만에 뵙게 됐네요. 오늘 강의는 베트남 전쟁 기억과 한국의 전쟁 기념입니다. 이 강의는 처음에 말한 평연의 기원인 민간인 학살과 우리가 왜 진료를 해야만 하는지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약력을 소개하면 호치민대학인문사회대학 석사 박사, 진실위원회 운영위원, 99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아맙이란 단체를 운영했고 현재는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십니다. 구수정 샘 모셔서 강의 듣도록 하겠습니다.

 

구 : 반갑습니다. 오늘 많이 졸리실 것 같은데, 저도 많이 졸려요. 새벽 2시에 일어났어요. 오늘은 내일부터 우리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현장 답사를 할 텐데 그 답사를 위해, 우리가 내일 만나게 될 이 전쟁 이야기와 성격, 그 안의 한국군 참전문제 등 이해를 돕는 방향으로 얘기를 하려고 해요. 사실 제가 가져온 PPT는 2시간 반 짜리인데요, 이렇게 하면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서 굉장히 줄여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베트남 친구들 제 이야기 들리나요? 이해가 어려우면 베트남어로 이야기할테니 말해주세요.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머나먼 쏭바강이라고 하는 책을 이름이라도 들어보신 분이 계신가요? 조기종 선생님은 연세가 계셔서 당연히 아실 것 같은데 젊은 친구들은 모르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머나먼 쏭바강의 저자는 누구인가요? 네, 여기 인터넷이 좀 느리죠. 머나먼 쏭바강의 저자는 지금은 작고하셨는데 고 박영한 작가입니다. 이 박영한 작가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백마 29연대 보도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참전 경험을 머나먼 쏭바강이라고 하는 소설로 쓴 건데요, 그 당시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당해에 오늘의 작가상을 받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에요. 베트남 친구 중 누구 한 명이 머나먼 쏭바강을 번역해 볼래요? 쏭바강은 뭘까요? 우리가 한국에서 한강을 영어로 번역할 때 한강-리버로 많이 해요. 그럼 한강강이 되죠. 쏭바강은 사실 베트남 중부 푸옌 성의 젖줄인 큰 강으로, 원래 쏭-바에요. 이제 이해가 되죠?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바강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쏭바 쏭바 이렇게 부르니까 쏭바강인가보다, 이렇게 된 거에요. 만약 베트남어로 번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쏭바 싸소이. 이렇게 됩니다. 바 강이 흐르는 푸옌 성에는 1975년, 이 해는 베트남에게 어떤 해일까요? 이선영 선생님? 1975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해죠.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100년 간 식민통치를 받아요. 한국과 베트남의 해방 기념일이 똑같아요,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서 우리가 같이 해방돼요. 그런데 1946년에 프랑스가 재침략을 했고 거기서 시작한 전쟁이 1975년에 끝나는 거에요.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30년 전쟁, 1만일 전쟁이라고 하죠.

 

예를 들면 45년에 태어난 아이가 30살이 되도록 계속 전쟁을 치른거죠. 오늘은 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이른바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은 53년에 끝나죠. 한국전쟁 직후 1953년 한반도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를 쭉 나열해주세요. 이성오 선생님?

 

휴전선

폐허

조기종 : 부러진 한강다리

이성오 : 저도 폐허

 

구 : 보통 53년의 한반도는 폐허, 초토화... 3년의 전쟁을 치르고 한반도가 초토화가 됐다고 해요. 전쟁 고아, 보릿고개, 굶주림 이런 것들을 떠올리죠. 우리는 3년의 전쟁을 치르고도 한반도가 초토화되고 온통 폐허가 돼요. 베트남은 100년의 식민지를 거쳐서 30년의 전쟁을 치렀어요. 그럼 75년 사이공을 제외한 베트남의 모습은 어땠을지 여러분들 상상이 되나요?

 

100년의 식민지를 겪는 과정에서 42년에는 일본이 베트남에 들어와요. 42년부터 45년까지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해요. 그런데 45년 봄은 태평양 전쟁 말기니까 일본이 굉장히 극심한 식량 공출을 해요. 그래서 베트남은 200만 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베트남 친구들은 이 얘기 아나요? 1942년 봄에 베트남에서 200만 명이 굶어죽었어요. 이걸 베트남어로 뭐라고 하죠?

 

200만 명이 굶어죽는다고 하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죠. 그러고 나서 해방되고 다시 전쟁을 시작해서 30년동안 전쟁을 치러요. 그 당시 베트남은 구석기와 다름이 없었다고 해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며 ‘베트남을 구석기 시대로 돌려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거든요. 베트남 중부의 1975년은 구석기 시대와 다름이 없었어요. 그런데 베트남 중부 푸옌 성의 붕따우 마을에는 1966년 말 12월 정도 한국군 부대가 들어가요. 그래서 66년 1월 한국군 부대가 들어가자마자 붕따오 학살이라고 하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요. 그리고 학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 후에 마을을 다 불태우고 불도저로 깨끗이 밀어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한국군은 왜 이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주민들을 다 소개시켰을까요? 베트남 사람들은 조상 숭배의 전통이 한국보다 더 깊은 나라인데, 한국군이 다 나가라고 하니까 집집마다 한 명씩을 남겼어요. 노인이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 갓 출산한 여성 등이 남아서 집을 지켰어요. 누군가 집에 남아서 제단에 불을 피워야 하니까요. 베트남은 3년상을 여전히 치르고 있어요. 그 당시에는 식민통치에, 기근에, 프랑스 재침략 등등 집집마다 3년상이었던 거에요. 그러니 무덤을 비워놓고 떠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남았는데, 베트남은 가뜩이나 아이들이 많으니 할머니가 피난가기 힘든 아이를 데리고 남는다던지, 만삭인 엄마가 아이를 남긴다던지 했었어요. 이렇게 남은 사람들을 학살한 거에요. 그렇게 학살이 끝나고 나면, 그 당시에는 다 초가집이었으니 다 불태우고 불도저로 마을을 싹 밀어버려요. 그리고 거기에 부대 기지를 만들어요. 그래서 한국군 학살 같은 경우는 1966년 1월, 2월 이 때 집중돼요. 전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났던 학살의 약 60~70%는 이 때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거죠.

 

그렇게 해서 이 붕따우 마을도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 돼요. 그리고나서 한국군 부대가 들어서요. 여기에 한국군이 주둔하는 동안에는 더 이상 마을사람들이 살지 않았어요. 그런데 75년 전쟁이 끝난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마을로 돌아와요. 이 사람들이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야말로 구석기 시대였어요. 허허벌판이었거든요. 전쟁 끝나고 한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여러분들 같으면 제일 먼저 뭘 하겠어요?

 

하리 : 흔적을 찾을 것 같아요.

 

구 : 집을 지어야겠죠. 텅 비었으니까. 그리고 또 뭘 해야 돼요? 땅을 다시 개간해서 곡식을 심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집을 짓거나 곡식을 심는 것보다 더 먼저 한 일이 있었어요. 여러분들 전쟁이 일어나면 뭘 할 것 같아요?

 

태영 : 도망...

 

구 : 어디로 도망을 갈까?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사재기를 해요.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 때 호리병같은 걸 들고 다녔대요, 여기에 쌀을 넣어서 비상식량처럼. 그런데 마을에 돌아온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개간하기 전에 호리병 속의 쌀을 각출해서 한국군 증오비를 지었다고 해요. 베트남에서 75년 베트남 최초의 건조물을 얘기할 때 여러분도 호치민 시 가면 항상 가는 곳이 있는데 전쟁증적박물관이 있어요. 이 건물이 75년에 세워져요. 그리고 이번에는 여러분이 빈호아 마을을 가지 않아서 밀라이 박물관은 안 가는 것 같은데,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군의 최대 민간인 학살이 바로 밀라이 학살이에요. 밀라이 마을에 가면 다시 돌아왔던 마을 사람들이 허허벌판에 가장 먼저 지은 것이 밀라이 증적 박물관이에요. 76년에 완공해요. 푸옌 성의 붕따오 마을에는 75년에 돌아온 사람들이 지은 한국군 증오비가 있어요. 그렇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 후 제일 먼저 뭘 한 걸까요? 재건을 한 걸까요? 이들은 자신이 겪은 과거, 전쟁, 역사를 기억하는 일부터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 저는 베트남 전쟁 기억과 한국의 전쟁 기념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빈호아 마을 안 가니까 잠깐만 얘기하자면, 사진 뒤 비 이름이 뭐라고 적혀있죠? 비아 깜 투. 깜 투는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는 표현이에요. 투라고 하는 건 한자로 복수라는 뜻이에요. 너무 미워서 복수하고 싶은 심정을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이 비의 이름을 어떻게 번역할까, 원망비? 복수비? 고민하다가 증오비라고 제가 번역했는데, 한국에선 거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것 같아요. 빈호아에서도 한국군 학살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옆에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지만 숫자가 적혀 있어요. 430명이라는. 빈호아 마을에선 모두 다섯 개 지점에서 학살이 일어나서 총합이 430명이 죽었다고 적혀 있어요. 이 430명 중 약 180명은 여성이었고 이 중 7명은 임산부였다, 약 180여 명은 어린 아이였다. 이들 중 2명은 산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배가 갈라져 죽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목이 잘려 죽었다. 이 마을의 일곱 가구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제가 이 곳에 99년에 들어갔다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이 마을에 자장가가 불리고 있었어요. 누군가 자장가 후렴구 한 번만 해줄래요? 보통 어으- 이렇게 후렴구를 하는데, 이 마을의 후렴구는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이런 자장가가 빈호아 마을에서 불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비 옆에는 뭐라고 적혀 있냐면, ‘하늘에 닿을 죄악, 만 대를 기억하리라’... 이 당시 증오비를 지었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지금의 분노와 원한 그리고 슬픔을 만 대를 기억하겠다고 이 비에 적은 거죠. 이렇게 베트남에는 증오비도 있고, 학살 지점마다 위령비를 세워놓고 있어요. 그런데 베트남에는 한국군 증오비, 또는 한국군에게 희생당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가 중부 곳곳에 서 있는데 한국에는 뭐가 있냐면, 월남참전 기념탑이라는 것이 서 있어요.

 

이 사진은 서울시 동작구 월남참전 기념탑이에요. 보통 한국에 세워진 기념탑들엔 뭐라고 적혀 있냐면 ‘갔노라(베트남),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 전쟁이 한국이 이긴 전쟁인가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전쟁에서 한국은 미군의 편에 가담해서 싸웠는데 미국이 이겼나요? 이건 미국과 한국이 진 전쟁이에요. 그런데 이런 기념탑을 우후죽순 세우면서 이렇게 적고 있어요. 일본의 역사왜곡을 얘기하기엔 우리도 마음이 굉장히 불편한 일인 거죠. 지금도 전국 방방곡곡에 기념탑이 서 있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똑같은 전쟁을 한국과 베트남이 경험했는데 이 전쟁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달라요.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내일을 위해서요.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전쟁의 이름을 베트남 친구들은 뭐라고 부르나요? 친구들은 항미전쟁이라고 부른대요. 그럼 한국 친구들은 뭐라고 부르나요? 젊은 친구들이 얘기해보세요.

 

신훈 : 월남전. 베트남 전쟁.

 

구 : 그런데 정작 베트남 사람들은 이 전쟁을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럼 뭐라고 부르냐면, 프랑스가 재침략해서 54년까지 일어난 전쟁은 항불전쟁. 프랑스와 대항해서 싸운 전쟁. 그리고 이후 미국이 직접 개입해서 54년부터 75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항미전쟁. 미국에 대항해 치른 전쟁이라고 불러요. 세계인들도 이 전쟁을 베트남전쟁이라곤 거의 안 불러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이렇게 불러요. 이 전쟁의 이름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를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왜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우리 과거 역사에서 치른 전쟁 이름은 어땠나요? 예를 들면 임진왜란. 이렇게 부르면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전쟁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죠. 한국전쟁입네, 이라크전쟁입네,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부르게 되면 전쟁의 성격이 사라져요. 전쟁의 주체가 사라집니다. 이른바 한국전쟁에서 200만 명이 죽었대요. 200만 명이 죽는다는 걸 여러분들이 상상해보세요. 전투기가 떠서 이 순간에 여기에 포탄이 떨어진다고 상상해보세요. 여기서 몰살당하는 사건만 해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잖아요. 근데 200만 명이 죽는다는 건, 보통 한국의 대학 총원이 약 2만 명이래요. 그럼 2만 명이 정원인 학교가 몇 개가 사라져야 200만 명이 죽을까요. 이른바 베트남 전쟁에서 300만 명이 넘게 죽었대요. 그런데 이 전쟁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잖아요. 전쟁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요. 이른바 베트남 전쟁도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퉁킹만 사건을 통해 국회에서 의결하고 전쟁을 시작하거든요. 대부분 전쟁은 치밀하게 기획되고 시작돼서 치밀하게 수행하는 거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선 누구도 수백만 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거예요. 이 전쟁을 기획하고 직접 수행해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주체가 사라져버려요. 세계인들이 부르는 이름은 최소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인 거죠.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소개하면 여러분들이 오늘 밤을 새도 모자랄 테니 책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과거 전두환, 노태우 이런 사람들이 이 전쟁에 참전했었거든요. 이 전쟁에 참전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한국 대통령이던 시절에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해 감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이야기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 1980년대에 유일하게 이 전쟁에 대해 책을 쓰신 분이 계세요. 바로 리영희 교수인데요, 책 제목은 ‘베트남 전쟁, 30년 전쟁’입니다. 이 책을 한국에 가서 보시면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 공산주의와 반공주의의 대립이었다,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굉장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거에요. 오늘 전쟁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대신 이 전쟁이 베트남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줄 만한 일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남베트남 임시 혁명 정부가 있었어요. 국방장관 쩜 반 짜라는 중장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는 날 해방군의 탱크가 베트남의 대통령궁을 쭉 밀고 들어가요. 이 때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이 있었는데, 해방군이 들어올 때 내각 구성한 30명을 데리고 기다렸다가 딱 일어나서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하거든요. 그리고 무조건 항복을 해요. 사실 사흘동안만 대통령을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온전한 사이공은 없었을 거에요. 사이공은 티끌하나 무너지지 않고 그 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해방군을 맞아들이며 인사를 했을 때 해방군의 쩜 반 짜라는 중장이 악수를 청하며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진 것도, 우리가 이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미국과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리고 대통령과 내각들을 사흘 동안 조사하고 그대로 풀어줘요. 그래서 대통령은 프랑스로 떠나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 베트남 사람들이 이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딱 보여요. 미국이 개입하고 직접 전쟁을 치렀지만 오직 남베트남만의 전쟁이었어요. 한국이 대대적으로 참전했지만 베트남의 17도선 위로는 한 발짝도 가지 않고 오직 폭격만 했죠. 실제로 이 전쟁은 남베트남이 치른 전쟁이었던 거죠. 보통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20세기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더러운 전쟁이었다’고 이야기해요.

 

이른바 6.25 전쟁 때 UN의 깃발 아래 모두 몇 개국이 참전하죠?

 

김현철 : 16개국가.

 

구 : 네, 맞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에 미국이 다 개입돼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은 스스로 세계의 경찰이라고 자부해요. 경찰의 역할이 뭐죠? 이 세상 어딘가에 싸움, 분규, 갈등이 있으면 경찰이 가서 해결해야 한단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대부분 전쟁에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해요. 그리고 미국은 개입하면서도 자신의 전쟁으로 만들지 않아요. 북에는 중국이, 남에는 미국이 개입했지만 미국은 다른 나라들을 끌여들여서 전쟁을 국제화시켜요. 한국전쟁 때 미국은 UN을 끌여들여서 전 세계가 함께 치르도록 해요.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국이 UN에 참전을 요청했어요. UN은 미국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나요? 정태환 선생님, UN은 왜 미국의 참전 요청을 거부했을까요?

 

정태환 : 자신의 국민들에게 거부당한 전쟁이기 때문에...

 

구 : 이 전쟁은 너무나 더러운 전쟁이라 UN의 깃발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부해요. 그러니까 NATO에도 참전을 요청해요. 미국의 최우방국이 들어있는 국제기구들도 같은 이유로 거부해요. UN과 NATO가 거절하면 사실 참전할 국가가 없어요. 그래서 미국이 스스로 돈을 다 대서 만든 국제기구가 있어요, 그것이 SEATO 즉 동남아시아조약기구인데요. SEATO마저도 참전을 거부한 이유는 뭘까요?

 

변하연 : 내부의 반전 운동 때문에...?

 

구 : 미국의 도움 받아서 만든 기구인데도 왜 참전요청을 거부했을까요? 얼마나 더러웠으면 거부했을까요. 슬라이드에 ‘미 국민들에 의해서도 거부당한 전쟁’이라고 적었는데요. 한국 내 징집거부자, 병역거부자는 1년에 몇 명이나 될까요? 저도 잘 모르지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이 휴전 상태이긴 하지만 전시라고 이야기하긴 어렵죠. 평시라고 봐야죠. 하지만 이 때는 미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때였는데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 징집을 거부한 미국의 청년 숫자가 57만 명이에요. 유례가 없는 숫자죠. 여러분도 알 만한 유명한 사람들이 이 때 징집을 거부했어요. 무하마드 알리는 징집을 거부해서 챔피언 벨트를 박탈당해요. 빌 클린턴도 징집을 거부해요. 1년 동안 한국의 탈영병은 몇 명일까요? 굉장히 드문 일이죠. 그런데 1968년이면 가장 전쟁이 정점에 당한 때에요. 이 때는 이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요. 바로 구정대공세죠. 올해는 구정대공세 50주기인 해에요. 그래서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고요. 이 1968년 한 해 동안 미군 탈주병이 5만3352명이 탈영해요. 미군 탈주병 1호가 누군지 아세요? 한국인이었어요. 김 진수라는. 일본으로 가서 탈주했고 지금도 살아있다고 해요. 전시에 5만3천명이 탈주하는 거예요. 미국민들로부터 거부당한 전쟁이라고 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겠죠?

 

우리가 반전운동에 대해서 얘기해도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하나만 얘기하자면, 아시아에서 일본은 베트남 반전시위가 가장 크게 일어났던 나라예요. 이성오 선생님이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한국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던 시기가 1987년 이쯤 되죠? 이 시기에 한국 노동사 쪽에서 10만의 노동자가 파업한 적이 있나요? 총파업.

 

이성오 : 숫자는 모르겠는데 대구항쟁인가 그 쪽에.

 

구 : 결집은 하는데 총파업은 못했던 것 같아요. 한국의 역사 속에 100만의 노동자가 총파업을 한 적이 있나요? 오마이뉴스 기자분 어떤가요? 없습니다. 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210만 명의 일본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해요. 210만 명이에요, 어마어마하죠.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반전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던 나라인데 왜 그랬을까요? 일본인들이 평화적이어서 그랬을까요? 도대체 일본에선 어떻게 210만 명이라는 노동자가 동시에 반전시위를 일으켜서 총파업을 결행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에서 무기를 공급해줬나요? 일본에서 개입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하면 반대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 : 일본에서 미국의 기지가 있었고 B51전투기가 오키나와에서 출격하니 개입됐다고 할 순 있겠죠. 저는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평화를 사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원폭 경험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본 사람들인 거죠. 최소한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평화감수성이 생겨났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격렬하게 반전운동을 했던 이유가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 한 건의 반전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한반도가 아니에요. 북한도 반전운동을 했지만 한국은 반전운동의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던 거죠.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굉장히 독려하고 찬양했어요. 예를 들면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좋아하시나요? 서정주 시인은 일제치하에서 천황의 가미카제로 죽으라는 시를 써요. 모윤숙 시인도 천황의 적자가 되는 길은 전선에 나가는 길 뿐이라고 쓰기도 해요.

 

서정주나 모윤숙 등의 지식인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니까 또다시 한반도 청년들에게 이 전쟁에 가라고 부추기는 시를 써요. 한국이 베트남에 처음으로 파병한 해가 1964년 비둘기 부대라는 비전투부대가 갔어요. 공병대, 의무대, 태권도 교관단 등 2천 명 규모가 파병돼요. 그리고 1965년 말부터 전투부대가 파병돼요. 그래서 1966년은 한국군 파병 정점을 이루는 해에요. 1966년 9월에 박순천 여사, 당시 야당 민중당 총재인 분인데 참전 장병을 위로하겠다고 베트남을 방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행해요. 저는 그래도 역대 대통령 중 역사 인식이 뚜렷하고 확고했던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시 야당 총재인 박순천 여사를 수행해 베트남에 왔다가 돌아간 뒤 박순천 여사가 직접 글을 써서 동아일보에 기고해요. 박순천 여사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볼 때 베트남 땅이 그렇게 풍요롭고 황홀하더래요.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출 정도로요. 글을 그대로 읽자면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감격.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잘하면 한국이 차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써요. 상상이 돼요? 이 분이 야당 총재 자리까지 여성의 힘으로 올라가기까지 가장 큰 이력이 항일운동이었어요. 일제치하에서 일본에 저항해 싸운 항일 이력을 가지고 총재가 되지만 베트남에 와서는 이 땅을 보고 아 이번 기회에 우리가 먹었으면 좋겠는데 라고 얘기를 하는거에요. 우리 안에 있는 아류 제국주의를 보여주는 거죠. 이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이런 태도였다는 거죠. 동아일보에 이 글을 직접 기고까지 했어요. 한국은 반전운동의 무풍지대였을 뿐 아니라 대다수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방조함으로써 한국인 대다수가 이 전쟁의 공모자가 됐다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호치민에 가서 전쟁증적박물관에 가면 이 도표를 그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 보면 한국이 처음 베트남에 파병한 날짜를 1964년 9월 22일이라고 적혀있어요. 한국이 철군한 날짜는 1973년 3월 22일이에요. 이 날은 어떤 날이냐면 1973년 1월에 이 전쟁을 끝내자는 종전협정이 파리에서 체결돼요. 파리 협정이라고 부르는데요, 여러 규약 중 하나가 이 협정 체결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외국군은 철군한다는 거였어요. 1973년 3월 22일은 딱 60일이 되는 날이었어요.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는 거죠.

 

밑에 보면 참전 국가들이 있는데 총 5개국이에요. 아까 UN, NATO, SEATO도 거부한 전쟁이라고 했어요. 미국이 더 이상 참전에 동원할 국제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내세운 정책은 모어 플래그스, 베트남에 더 많은 깃발을. 미국이 어떤 나라에 참전을 요청하면 들어줄까 고민하며 작성한 명단이 있어요. 그 명단엔 총 25개 국가가 있었어요. 이 나라들은 요청을 들어주겠지, 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 나라들 하나하나에 참전요청서를 보내지만 동의한 나라는 고작 5개국 뿐이었다는 거죠. 그 중 한국은 모든 면에서 1등이에요.

 

한국은 미국의 참전 요청에 제일 먼저 응답한 나라에요. 미국이 한국에게 먼저 참전을 요청했을까요, 한국이 미국에게 먼저 참전 요청을 했을까요? 한국이 요청한 해는 몇 년도일까요? 이승만 때 이미 한국이 미국에게 참전을 요청해요. 1954년 1월에 이승만이 미국에게 참전을 요청해요. 1954년은 한국전쟁 막 끝난 다음 해에요, 그것도 1월에. 미국이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을까요? 아닐 거예요. 미국은 이승만의 참전 요청을 왜 거절했을까요?

 

석환 : 미국은 더 많은 국가가 참전하길 바랐기 때문에 한국이 먼저 참전하길 바라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니면 한국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 : 54년은 이른바 한국전쟁이 막 끝나서 한반도가 초토화가 돼 있었고 미국이 원조하는 밀가루 등으로 근근이 연명하던 때에요. 이런 때 이승만이 파병하겠다고 제안하면 저 같으면 네 주제를 알라, 이럴 것 같아요. 그런데 외교문서에는 그렇게 쓸 수 없잖아요. 공식적으론 여전히 한반도 최고의 적은 북한이다. 그러니까 너희나 잘해, 이런 식으로 파병 요청을 거절해요. 그 후로도 이승만이 여러 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안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죠. 그 후 1961년 박정희 때 쿠데타 성공한 직후였어요. 쿠데타 성공하면 뭐 해야 되죠? 형님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해요. 박정희가 아직 승인을 받지 않은 최고 의장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박-케네디 회담, 워싱턴 회담을 한 것이 최고 업적이에요. 여기서도 박정희가 먼저 참전시켜달라고 제안해요. 케네디도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뭘까요? 한반도가 불안정한 상황이니까. 케네디는 ‘남의 나라 군대가 지켜주는 나라에서 파병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다’ 라고 해요. 한반도는 여전히 미군이 지키죠. 그런데도 박정희가 포기하지 않고 파병시켜달라고 졸라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미군이 파병요청서를 보내오니 그야말로 얼싸구나하고 응답한 거죠.

 

한국은 연 병력 5만 명씩 약 8년 동안 총 32만5천 명 이상 파병해요. 여기 보면 호주는 연 병력 7670명, 필리핀도 연 병력 2060명, 태국도 베트남과 굉장히 가까운 나라인데도 연 병력 1만1,570명. 호주는 550명이에요. 그리고 이들은 전투부대를 보내지 않아요.

 

맹호, 백마, 청룡 3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보낸 것은 유일하게 한국이었다는 것. 자료를 보면 1972년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숫자보다 한국군 숫자가 많아요. 마치 우리의 전쟁처럼.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가장 먼저 화답한 나라이며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파병한 나라,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 가장 오래 주둔한 나라, 가장 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 나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파병의 대가를 잠깐 보죠. 지난 현충일 때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참전으로 지금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베트남이 굉장히 크게 반발한 적이 있었어요. 처음으로 외교부 차원에서 항의하고 성명을 내고 했어요. 일본의 학자가 어느 학술대회에 가서 얘기한 것 중 굉장히 유명한 것이 있어요.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게 내린 선물이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패전으로 폭삭 주저앉았다가 회복하게 된 계기가 한국전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인들이 엄청 반발을 했었죠. 근데 우리 학자가 또 다른 학술대회에 가서 똑같이 베트남전쟁은 신이 한국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얘기했어요. 이런 얘기 들으면 베트남 친구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기분이 좋지 않겠죠. 한국 사람들도 그랬어요.

 

이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이 얼마였냐는 것은 학자들마다 다 달라요. 많이 보면 50억 달러까지도 봐요. 그런데 최소 약 10억 달러라고 해요. 한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벌어들인 돈이 최소 10억 달러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될까요? 비교해 보면 63년, 파병 바로 전 해 대한민국의 총 수출액이 1억 달러가 안 됐어요. 그럼 이게 얼마나 큰 경제적 이득인지 알겠죠? 또 다른 비유를 들면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이 동시에 추진되는데 그 배경은 미국이 있어요. 우리가 36년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으로 받은 돈이 8억 달러가 안 돼요. 그럼 10억 달러가 어느 수준인지 실감이 되나요? 최소 이 정도를 한국이 이득을 얻었다고들 얘기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따져봐야 될 것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나라가 한국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미국 다음으로 적극적 파병을 했고 젊은이들5 많이 죽고, 1만여 명 이상이 불구가 됐어요. 지금도 고엽제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고요. 그런데 최대 수혜자가 아니었어요. 그럼 누구였을까요? 단 한 명도 파병하지 않은 나라에요. 바로 일본. 한국이 8년 6개월 간 벌어들인 10억 달러보다 큰 소득을 일본은 매 해 챙겨요. 전쟁 총 기간 번 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매 해 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경제 규모 격차가 있었는데 비교가 가능하단 얘기를 해서 다른 나라 얘기도 해볼게요.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이며 파병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나라인 대만. 대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딱 25명을 보내요. 베트남에 약 25명을 보낸 경제적 이득과 한국이 본 이득에 별 차이가 없어요.

 

그럼 과연 베트남에 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에 몰아넣어서 경제 특수를 얻는 것이 의미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아요. 두 번째, 과연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실제로 국가 이익이었을까? 아니면 박정희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건 아닐까? 실제로 참전 군인들은 자기 월급도 못 받았다고 그러세요. 이 때 번 돈이 박정희 스위스 계좌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죠.

 

여기 보면 참전 국가들의 월급이 비교돼 있는데, 하사 이상의 장병들의 월급이 필리핀이나 태국의 약 1/3 수준밖에 안 돼요. 필리핀이나 태국은 한국보다 훨씬 소극적으로 파병했잖아요. 그런데 미국으로부터 훨씬 더 많이, 한국 장교보다 3배 이상의 월급을 챙겨가요.

 

남베트남과 한국군의 월급을 비교해보면, 한국군은 원정군이잖아요? 미국의 용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용병은 돈을 벌자고 하는 건데, 최소한 원정군인 한국군이 남베트남 병사들보다 적은 월급을 받았어요. 어쨌든 국가가 결정해서 젊은 목숨을 전장에 몰아넣었다면 최소한 국가가 할 역할은 이 목숨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젊은 목숨들을 헐값 목숨으로 만들었어요.

 

어느 논문에선가 이마를 탁 친 구절이 있었는데, 한 일본 연구자가 ‘미국은 이 전쟁에서 총알을 제공했고 일본은 물자를 팔았으며 한국은 피를 팔았다’.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6년 전에 찍은 사진인데, 한국에 서 있는 참전기념탑을 제가 찍다가 더 이상 못 찍겠어서 포기했어요. 근데 지금 훨씬 많이 서 있어요.

 

지난 APEC 일정상 문재인 대통령이 다낭에 와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죠. 역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했던 유감 수준의 사과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몇 주 후에 호치민 경주엑스포라는 행사가 열렸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영상 메시지를 보내서 한국민들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갖고 있다는 식의 에두른 사과를 했어요. 만약 부산에서 한일문화축전이 열렸는데 일본의 아베가 영상메시지를 보내서 일본 국민들은 한국민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과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협력 파트너이자 친구가 됐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하리 : 안 좋죠. 일본은 이득봐 놓고 말로만...

 

구 : 대부분의 베트남 친구들이 잘 모르지만, 호치민경주엑스포라는 행사에 문재인대통령이 똑같은 말을 했어요. 이 메시지를 받은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도 우리랑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죠. 더욱 놀라운 것은 정확히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가 도착하던 날 경주 한복판에 또 하나의 참전기념탑이 준공됐어요. 이런 탑들이 한국에 우후죽순 서고 있습니다.

 

여긴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라는 곳이에요. 여긴 참전 군인에게는 성지같은 곳이래요. 파병 당시 여기에서 한 달 동안 훈련받고 베트남에 갔던 거죠. 여기서 술파티를 벌이는 등 많은 추억이 있는 거죠. 화천군에서 180억 예산을 써서 참전을 기념하는 시설을 지어놨어요. 시설 이름은 월남 파병 전사 만남의 장이에요. 여기 여러 번 갔었는데, 초등학생 모아놓고 월남 파병 용사들이 먹었던 식판 어쩌고 하면서 거기에 밥을 먹이고 훈련도 체험이라고 시키고 있더라고요. 보시다시피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설이에요. 이게 처음 세워진 것이 노무현 정부 때인데 세우고 나니까 전국에서 파병 군인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왔었어요. 그런데 1년을 지나고 나니까 하루에 여길 찾는 사람들이 10명도 안 되는 거에요. 그러니 화천군에서 하루 방문객이 열 명도 안 되니까 큰일이 난 거죠. 그래서 어떤 아이디어를 내냐면 여기에 관광 산업을 연계시켜야겠다, 해서 이 시설에다 베트남 전통 마을, 베트남 구찌 땅굴 등을 만들어요. 정말 정교하게 잘 지어놨어요. 그런데 문제는 구찌 땅굴 앞에다가 이런 조형물(한국군이 총을 겨누고 베트콩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모습)을 만들어놨어요. 역지사지 해 보자면, 일본 순사가 칼을 겨누고 조선 의병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조형물을 만들어놨다고 하면 정말 큰일이 날 거에요. 제가 생각하기엔 최소 손가락 100개 정도 잘려나갔을 거에요. 일본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단지 많이 하죠. 저도 직접 조형물을 보고 사진도 찍었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보기에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나봐요. 그래서 여기 지나던 사람들이 이걸 발로 차더라고요. 몇 달 뒤 가보니까 무너져 내렸어요. 지금은 다행히 없어졌어요. 여기서 고백하건대 저는 단 한 번도 발길질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제가 2002년인가 일본에 갔는데 동경외대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베트남 전쟁이라고 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있었어요. 이 때 처음으로 일본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얘기를 하려니까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 때 참석자 중에 일본 평화운동가인 오다 마코토 선생이 있었어요. 제가 발표할 순서가 됐는데 오다 선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에게 큰 절을 하면서 사죄를 했어요.

 

그래서 그 뒤부터 일본에서 일본사람들 앞에 두고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이야기하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저는 오다 선생이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오다 선생에게 관심이 생겨서 책이란 책은 다 찾아봤는데, 한 대목이 참 강렬했어요. 우리는 굉장히 많은 억압과 착취, 통치를 당한 피해자, 하지만 베트남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가해자다.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그런데 오다 선생이 자신의 책에서 ”피해자면서 가해자란 없다.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베트남에 군인이 보내줄 때 지식인들이 반대하거나 반전시위를 하지 않았어요. 목적이 너무나 명확하게 사람을 죽이고 불태우고 싹쓸이하라고 보내진 건데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요. 내가 피해자가 되기 이전에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저항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노력을 우리 사회와 지식인들은 하지 않았던 거에요. 그래서 오다 선생은 그렇게 이야기한 거에요.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증거는 수도 없이 발생해요.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역사 속에서 무궁무진해요. 그래서 우리는 피해자면서 가해자라는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기억과 기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흔히 기억한다고 하면 과거 어떤 사건을 소환하는 것을 의미하죠. 과거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얘기해요. 근데 이건 단순한 사전적 의미고, 저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건 사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한다는 건 단순히 과거를 되새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이 기억을 계승하고 사회적 책임을 계승하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여기 오신 분들, 그리고 내일 만나게 될 과거들... 그 때 태어나지도 않은 친구들이 굉장히 많지만 그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공동체 일원으로 살고 있는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한다는 건 사회적 책임을 같이 하고 계승해 나가는 행위여야 한다는 거에요. 역으로 세월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저는 기억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진료하고 과거를 되새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강의 내용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질의응답을 해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4월에 시민평화법정이라는 것을 해요. 2002년 도쿄에서 시민평화법정, 위안부 법정이 열렸죠. 일본은 이미 10년도 전에 도쿄에서 위안부 법정이 열렸고 이 법정에 전 세계 100명이 넘는 위안부 할머니를 모셨어요.

 

올해가 민간인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고, 사실 실제로 2014년 한국군 파병 50년이 되는 해였거든요. 그리고 2016년이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이 되는 해였어요. 근데 역으로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베트남 중부 각 마을마다 민간인 학살 50주기가 2016~2018년에 계속 이어졌던 거에요. 3년 간 이어졌던 50주기가 올해 끝나게 되는 건데, 올해 4월에 50년 만에 굉장히 뒤늦게 시민평화법정을 열어서 베트남 피해자들을 원고석에 모셔오고 대한민국을 피고석에 세워서 50년 만에 재판을 합니다.

 

신훈 :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때 계속해서 파병요청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그 이유가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서 뿐이었나요?

 

구 : 이승만은 이른바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마치 아시아 자유진영의 영웅인 것처럼 등극해요. 이승만 개인의 야심도 굉장히 컸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당시 한국 군대의 규모가 20개 사단 규모였대요. 근데 파병요청을 하면서 20개 사단에서 25개 사단으로 증강해 달란 요청을 해요. 개인의 야심과 군사적인 이유 등이 결합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6월 항쟁도 경험했고 촛불 혁명 등도 경험했잖아요. 우리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촛불혁명보다도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나왔던 사건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에요. 거의 전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갈 정도로 거센 반발이 있었는데, 한일협정 반대 데모도 그렇고 그 당시에 박정희가 대단히 정치적으로 위기를 겪어요. 경제적인 목적도 있었겠지만 박정희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목적도 갖고 있었죠. 보통 독재자들이 전쟁을 통해 자신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흘러나가게 만들죠. 한국전쟁 이후로 실전 경험을 갖지 못하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적인 목적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 때문에 파병을 제안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자신이 한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빨갱이 경력을 받죠. 그래서 미국이 박정희를 많이 의심하고 있었어요. 아마 박정희가 케네디를 만났을 때는 미국의 의심을 일거에 제거하는 것도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연 : 불편한 역사지만 기억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책임을 축소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배후 조종자가 있을 수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전쟁은 치밀한 기획 하에 이루어진다고 얘기하셨고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하셨는데 미국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배울 때는 사실 축소돼서 배웠으니까요. 베트남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전두환-노태우 이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5년 뒤에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요. 이런 것도 이야기가 됐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구 : 시간이 짧아서 한국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미국이 베트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 계기를 통킹만 사건이라고 얘기하죠. 북베트남 영해에 접근한 미국의 어뢰정을 선제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됐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미국은 정보공개법이 있어서 아무리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어도 30년이 지나면 기밀을 해제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2005년에 전쟁과 관련된 극비문서가 공개됐는데 사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요. 1945년부터 사실 이야기해야하는데 굉장히 길죠. 미국이 처음엔 프랑스의 전쟁을 지원함으로써 애초 최소한 베트남의 남쪽을 지키는 것이었는데요, 이런 얘기를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 것 같아요.

 

오늘 제가 한 이야기는 내일 만나야 될 현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한 거고요. 최근에 CIA 문서가 공개됐는데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광주는 없었다... 이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까지 연결이 되는 거죠. 어쩌면 한국군 학살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안에 내재된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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