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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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9317()

장소 : 퐁니마을 위령비 및 응우웬 티 탄 아주머니 집

설명 및 진행 :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녹취 : 문혁 (건치신문)

 

 

74명의 학살 사건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학살 사건. 왜 유명한가?

 

1968. 2. 18 청룡부대 1개 중대가 1번 국도를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음. 한국의 경부 고속도로처럼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동맥, 핵심도로. 부비트랩으로 한 병사가 부상을 입게 돼서 안쪽마을로 들어와서, 주민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74명의 학살이 일어남.

 

탄 아주머니는 학살 생존자. 학살피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분. 뇨 할아버지는 학살 생존자가 없음.. 생존자여도 1살 두 살, 엄마가 안고 있어.. 증언이 가능하나 다 돌아가셨거나.... 탄 아주머니는 8살이어서 증언이 가능함. 많이 없는 증언자.

 

한국군이 부비트랩 맞아서 보복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대,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양상이 있음. 안쪽 마을로 들어가서, 가장 많은 주민들을 모은 곳이. 야유 나무. 당산나무 같은 것. 마을 중심가나 입구 쪽에 신령이 깃든 나무를 당산 나무라고 부르죠. 한국군이 주민들을 수색하고 끌어내서 야유나무 근처에 끌어 냈다. 주민들을 야유나무 근처로 끌어내서 학살했다는 증언이 있음. 탄아주머니 증언을 들어보면 방공호에 숨어있었는데, 한국군이 발견함. 수류탄을 까면되는데, 올라오라고 함. 가족들이 거부하다가 한명 한명 올라올 때마다 죽임. 그 방공호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었음.. 한국군이 여성이고 어린아이임을 알고 죽인 학살. “광기가 주체할 수 없이 폭발해서

 

고경태 기자 : 퐁니퐁옌 학살 1개 중대 1소대 2소대 3소대가 차례로 통과함. 그때 1개 소대 병사의 증언(2소대 소속) “내가 듣기로 중대장이 다 죽였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함.--> 시민평화법정 때 영상 지원을 함.

 

기가 막힌 것이 있음. 베트남 전쟁 당시. 게릴라 전을 벌일 때 발포제한 구역과 자유발포 제한 구역 2가지로 나눴음. 남베트남, 미국과의 관계를 맺은 곳. 지침으로 2개로 나녔는데, 안전 마을, 발포 제한구역이었음. 퐁니는 남베트남 가족들이 많았던 곳. 그런 곳에 한국군이 들어와서 일을 저지른 것. 주민들이 무자비로 학살 했기 때문에.. 시체들을 유가족들이 찾아야 하니까, 시체들을 잘 모아놔야.. 또하나는 항의성.. 남베트남 가족이 많았는데 죽여서 항의함.

 

시체를 늘어놨던 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사당을 지어놨음. 그리고 나서 1년 뒤 퐁니퐁연 학살 유가족들이 남베트남에 항의를 보냄. 가족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탄원서를 보냄. 그렇게 주민들이 억울해 했다. 아주 오랜세월.. 주민들의 억울함 목소리를 알지 못했음. 남베트남 정부도 들어주지 않고,., 오전에 있었고 점심 즈음에 바뀌었음. 그근방 미군이 있었음. 한국군이 집을 불태우고, 수류탄 소리가 들리니.. 미군들이 무슨 일이 있구나 알아채고., 주민들을 구조하고 기록을 함. 그 때 본 상병이 학살 피해자들의 시신 사진을 찍음. 사진 기록이 미군 조사 보고서에 30년동안 기밀해제 되기전, 미군의 기록물 보관소에 기록돼 있음. 2000년이 됐을 때 기록해제 돼서 사진을 확보함. 본상병 기록 메모, 미군 조사 보고서, 미군이 한국군에 보낸 서신. “이런 사실을 확인했으니, 사실을 파헤쳐라”(총사령관이 총사련관에게) 퐁니퐁옌 학살 희생자.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사진을 최초로 보게 됨. 굉장히 큰 이슈가됨. 유일한 사례.(학살피해자 사진)

 

채명신 장군 레스트 모런 장군에게 베트콩의 소행으로 보인다. 위장해서 저지른 자작극이라 생각한다답변하고 넘어감. 한국군의 조사가 얼마나 이뤄졌는지.. 2000년부터 20년째 추적하는 고경태 기자가. 취재한 이야기 학살 사건 있고 나서, 소대장 병사들이 귀국했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소환해서 1,2,3소대장 심문을 함. 그리고 소대장에 대한 심문 내역이 정확히 공개 되지 않음. 고경태 기자가 따로 증언을 들음.. 그 기록을 봐도 명확하게 어느 소대가 했는지 모름. 1소대장 ”1소대는 그냥 지나갔다“ ”학살은 2~3소대...“ 증언자도 2,3소대 중 하나가 했을 거다. 민주화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국정원을 상대로 공개하라 문건! 소송건 상황. 공개를 할 수 없다 했다가. ”국익에 반하기 때문에공개를 거부함. 지금도 시민평화법정.. 퐁니퐁옌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 함. 우여곡절이 많았던 학살이 퐁니퐁옌 학살. 오랫동안 취재하면서, 사진 작업을 많이 함. 기록전. 2년전 한국에서 시작. 순회 전시회 중. 제주에서, 부산에서, 그리고 43일에는 광주에서 예정 됨. 퐁니퐁엔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다.

 

2015년 한국 방문. 생존자 중 최초. 증언. 184월 시민평화법정 원고로 증언을 함;. 퐁니퐁옌 학살과 하미학살 사건 다룸. 피고 대한민국 잘못을 인정한다 원고 승소판결을 내림.. 한국 시민단체들 양심있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피해자들 손을 들어줌.

 

탄 아주머니는 시민평화법정은 이겼는데, 진짜 법정은 언제가는 거냐? 질문을 함.

 

퐁니퐁옌 위령비너와우리. 건립 생존비.

 

사당을 지어놓고 참배를 했는데, 나와우리가 모금을 해서. 베트남 음식팔아서.. 겨우 돈 모아서., 처음에는 액수가 정확하지 않은데 2천만원 모아서 해야한다고 했는데, 돈을 다 못 모음. 주민 분들에게 돈을 아직 못모았습니다. 시간을 주십사하고.. 나와 우리 한베평화캠프.. 몸을 통해 지은 사업. 한국 사람들의 사과하는 마음. 받아 준

 

위령비 문구. 1968. 2. 12 꽝낭섬 야유나무. 74명의 주민들이 학살 당했다. 이게다.

 

한국의 어느 교수가 퐁니퐁옌 인민위원회와 만나 주민들이 인민위원회에 모임. 청취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함. 2000년 초기 마지막 질문. 7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끔찍한 학살이었는데 한국 정부에 사과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바라십니까.

 

어떤 한분이 일어나서 이렇게 대답함. 우리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는 것이 우리의 방침. 미래로 가는 측면에서

 

그때 탄 아주머니가 그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서 나는 그렇게 생각안합니다. 당신은 자기 가족이 안죽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잇지. 나는 엄마가 죽고, 이모가 언니가 남동생이 죽었고, 남동생이 피 철철 흘리는 데 내가 데려가지 못해서 죽은 걸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신은 가족이 안죽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잇찌.. 나는 한국군이 너무나 증오스럽다거칠 쏟아냈다. 옆에 있던 유가족들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참아왔던 것이다.

 

과거를 닫고 미래를 가는 것이 베트남 정부의 지침은 맞다. 그러나 피해자와 당사자 마음 유가족은 그렇지 않다. 한국 정부가 공무원들 파견해서 사과받고 싶으신가 물어본적 없다.

 

한일관계.. 위안부 문제.. 우리는 어떻게 답하나. 박근혜 정부가 인정한 것을 우리 할머니들이 인정했다고 보는가.

 

탄아주머니와 인터뷰. 전 날에도 70명의 한국분들을 만났다. 연달아 증언하기.. 힘들어..

 

제가 한국사람 특히 남자를 만나면 트라우마가 있었음. 한국군이 떠올라 너무 무서웠다. 차츰차츰 한국 단체들이 찾아오면서 한국남자들과도 편안하게 지낼수 있게 됐다. 나중에는 젊은 한국 남자들과도 가까이 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요즘에는 참전 군인들이 찾아올때가 있다. 그럼 찬전군인을 알아도 두렵거나 그렇지 않다. 트라우마가 많이 없어졌다

 

A. 자기 트라우마를 이겨가는 과정 속에서 평연을 만나고 있는 것. 한국에 가게 된 결심. 계기는? 학살 전시회를 하게 되며. 응우옌티탄 학살 피해자를 초청하게 됨

 

처음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한다해서 초청함. 그래서 오빠에게 의논함. 한국에 가도 되겠냐? 그랬더니 오빠가 저한테 한국에 간다고? 우리 가족 다죽인 나라에 간다고?“ 극구 반대를 했음. 처음에는 오빠의 말에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마음속에 가야만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74명의 원혼들이 한국에 가라고. 한국에 가야한다고 밀어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호치민 조차도 너무 먼 곳. 호치민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갔을 때 공황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제가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제가 어제도 한국분들을 만나 학살이야기를 했었고, 며칠 전에도, 30여분의 사람들이 찾아왔어. 처음 만난 분들도 있으니, 제가 지금 마음이 어렵지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1968년이 었는데, 저는 1960년생.. 어머니, 오빠, 언니, 저 남동생이 있었고, 아버지는 돌아기신 상태. 사건이 있떤 그날, 어머니는 장사를 해서 시장에 가서 안계셨고, 이모가 돌봐줬고, 이모의 아이가 같이 있었다. 212일 그날 아침. 오빠는 15, 언니는 118, 남동생이 5, 이모와 이모의 아들이 있었는데,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모가 방공호로 들어가자 해서 숨었다. 방공호에 들어가 있는데도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곧 한국군이 집으로 들어왔고, 이내 방공호를 찾아냈다. 한국군은 수류탄을 보여주며 나오라고 협박했다. 이모가 나가면 죽을 것 같아 거부했다. 그러나 곧 나가게 됐다. 그런데 한국군이 나오자마자 다 죽여버림. 배쪽 엉덩이쪽이 날라가는 중상을 입은 오빠, 놀러온 이웃집 오빠는 총에 맞고 바로 죽었다. 저도 올라가서 배에 총상을 입고 기절했고, 남동생은 그때 입에 총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이모는 집에 불을 태우려는 한국군을 막으려다 죽었다그리고 저와 오빠는 중상을 입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남동생이 입에 총을 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데, 나는 창자가 튀어나.. 오빠는 더 중상... 업고갈 정신이 없어.. 죽어가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어쩔수 없이 남동생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밖에없어.. 다른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물소가 입구를 막아줘.. 한국군이 버려두고 딴 곳으로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집에 안에 사람뜰이 10명정도가 있었음. 그리고 들어가서 이집에서 저기까지 한참을 걸어갔는데.. 목이 너무 말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닫. 오빠가 물을 달라했지만 물을 줄수가 없었다. 만약 오빠가 물을 마셨으면 못살았을 것.. 몇 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언니나 아주머니가 너희 어머니 다낭에 안갔어. 이런 이야기를 해줌. 어머니가 그날 아침에 다낭으로 시장에 나간 줄 알았는데, 안갔다고 한 것. 탄 아주머니는 엄마가 어딘가 있겠구나 싶어 엄마를 찾으러 다녔다. 엄마가 다낭에 안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엄마는 못 찾았다. 들판을 달리며 엄마 엄마 울면서 엄마를 찾으러 다녔다. 엄마는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채.. 정신없이 엄마를 찾아 다니고 있었는데, 오빠가 미군 헬기에 수송이 돼서 가려는 것. 그것을 알게돼서.. 작은아버지가 둘이 헬기를 타고 가라.. 오빠와 함께 다낭의 병원으로 가게 됨.,다낭 병원에 가게 돼서도 너무 무서웠다. 작은아버지가 오긴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둘이서 힘겨운 시간을 견뎠다.” “물소있는집에 나와 다른집에 있었읗대, 엄마를 찾으러 다녔는데.. 물소 다음집에 있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름. 엄마를 찾겠다고 들판을 다니고 할 때, 헬기 호송중인 오빠를 보게 되고 극적으로 구조 된 것.”

 

 

 

탄아주머니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 병원에 갔었을 때 엄마가 어딨냐고 주위에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어딨냐 살아있냐 물었으나.. 알고봤더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병원에 1년정도 누워있었는데, 3개월 정도 댔을대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너무 절망적이어서 왜 나는 안죽이고 우리 엄마만 데려갔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슬펐음. 병원에 나와서 작은 아버지 댁에 살았는데, 부모 잃고, 친척집에 얹혀 살기 시작함.”

 

전쟁이 끝났어도, 사는게 너무 힘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 어머니 저는 왜 안데리고 혼자 가셨어요.. 저는 왜 같이 안갔어요,. 너무 힘들어요... 외치는 나날..”

 

그리고 작은 아버지는 남베트남 병사.. 전쟁 후,, 사상교육 수송소에 갔고,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일이란 일은 다했다.. 밭일 논일 가리지 않고.. 정말 고생 많이 했다되뇌였다

 

20184.. 시민 평화 법정이 열렸다. 민간인 시민평화 법정 모의 법정. 당시 매우 기뻐했다.. 몇 달 후 탄의 가슴은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왜 한국 법정은 안 열리지? 진짜 법정은 열릴까? 올까? 물어보고 꼬박 1년이 흘러. 평연을 다시 만났다.

 

기쁜 소식 18“4.3평화재단에서 71주기를 맞아 상을 주곤 했음. 제주43평화상. 올해 일주일전에 연락을 받는다.- 그래서 43일에 한국에 간다. 추도식에 참여 예정. 서울에 온다. 한국에 만날 기회 있을 것. 한국의 의미있는 상을 받았다. 마음을 다잡고 있다.

 

많은 한국분들과 오래, 다양한 사람들.. 만남. 좌담회, 프로그램 등.

 

창자가 얽힌채로.., 아픈 시기가 있었음.. 시간이 지나면 아프기보다는 쑤시고.. 아픈 정도..? 후유증

 

저랑 저의 아저씨랑 부모가 열심히 쉬지않고 살았다. 집을 짓는 일을 할 때 밤에 불을키고열심히 일하며 살았고, 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최근에는 땅도 몇마지기 사서 달려나가서 일도 하고 밭일 논일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아이들도 못지 않게 열심히 산다. 아이들이 장성해서 먹고사는 일을 하게 되면서 잘 살아가게 됐다.”

 

나이가 60. 젊은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 몸으로 겪은 전쟁을 절대 겪지 않게 하는 것. 전쟁이 일어나면 억울한 사람들이 생김. 우리 가족처럼. 여자와 아이들밖에 없는데, 야만적으로 비참하게 죽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평화의 메시지를 남겼다

 

피해자들은 이야기 해야한다. 저같은 피해자가 이야기를 홰야. 그날의 진실과 역사가 알려질 수 있다. 피해자 전부에게 이야기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국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해야한다. 베트남 정부가 편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탄 아주머니 인사.

 

너무 감사드린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함께 해줘서 감사드린다. 활동 잘 이끌어 나가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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