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연이 만난 사람

 

 

일시 : 2019319()

장소 : 푸틴 호텔 강당

사회 : 김정우

통역 : 바오옌

이야기 손님 : 응우웬 티 탄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웬 응옥 뚜이엔 (다낭대 한국어학과 교수)

녹취 : 문혁 (건치신문)

 

 

김정우: 주민들은 가슴 아파하며, 연꽃으로 덮었다. 아직 51년이 지난 하미 학살의 기억은 비문아래 덮여 있다. 저희가 만났던 작고하신, 파티안 아주머니, 탄아주머니도 그렇다. 아주머니 인사 한마디 하겠다.

 

: 응우옌이탄이라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평생 비행기를 타본일이 없었다. 집에서 멀리간 적도 없었다. 아주 용기를 내서 작년 한국에 갔다. 한국에 가서 모의법정에 서고, 1968년 마을 학살을 증언에 선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오늘 오후에 기회가 돼서 한국 의사들과 같이 마을에 들어가서 봉사활동을 어떻게 진행하는 지 목격하게 됐다. 마치고 돌아와서 이 자리에서 제가 겪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뚜이옌: 한국이름은 시내라고 합니다. 졸졸졸 시냇물. 2004년도 한국어과 2년생일 때, 진료활동에 참여하게 됨. 15년이 지나.. 평연과 만난 것은 인생의 큰 전환점. 사회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가져야 가는지.. 생각하게 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됐다. 좌담회가 낯설지만 오래 전 본 선생님을 다시 뵙게돼 반갑다.

 

김정우: 국가배상소송도 준비하고, 탄원도 준비중. 제주43평화상에 두 분 할머니가 선정돼 한국에 돌아가시게 돼.. 등등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어렵지만.. 아주머니의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겠다.

 

뚜이옌: 질문 하나씩 하면 좋을 듯 싶다.

 

김정우: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게 1968년 그날 학살을 어떻게 목격했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야기 하겠다. 한국 모의법정에 섰을때도 학살을 목격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법정을 지켜봤던 선생님도 계시고 모르는 선생님도 계시기 떄문에 이야기를 하겠다.

 

그때는 11살이었다. 그날 아침 630분이었다. 집앞에 나갔다. 나갔는데, 여쭤보니, 한국군이 2명이 서 있었다. 한국군이 총을 나에게 겨눴다. 나는 무서워서 집에 뛰어들어가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큰일이야

 

제가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한 순간에 이웃집에서 3명의 모자가 옷이 다 벗겨진 채 들어왔다. 집은 한국군에 쌓여있었다. 그래서 당황해서. “엄마 포위당했어한국군인들이 저희 집으로 쳐들어 왔다. 한국군이 나를 잡고 던져버렸다. 그 다음에는 집에 있는 사람들을 방공호에 몰아넣었다. 방공호는 입구가 2개였는데 양쪽 구멍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이 터지자, 몸에 아픈느낌이 없었다. 그저 너무 뜨거웠다. 피냄새가 몸을 감쌌다. 아무것도 판단이 안됐다. 동생이 살아남았느느지.. 그저 엄마는 확실히 죽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때는 엄마는 확실히 죽었고, 동생 상태는 보니까 한쪽다리는 절단됐는데, 절단된 다리에는 한덩이의 살줌이 덜렁거렸다. 한국군은 학살 후 항상 했던 짓이 집을 불태우는 것이 었다. 동생에게 기어갈 수 있는지 묻고 옆집으로 기어가자고 말했다. 옆집은 벽돌로 지어져 불태워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아침에 이웃집의 한 아이가 놀러와서 같이 학살을 당했다. 같이 방공호에 있던 그아이는 멀쩡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시끄러우면 한국군이 다시 들어올까봐 아이의 입을 꾹 막았다. 입을 막을수록 무서웠던 그아이는 손을 떼고 방공호 밖으로 나가 할머니, 할머니를 외치며 마을을 빙빙 돌았다.

 

물어봤다. 동생은 너무 아파 그런지. 못 간다고 했다. 나는 무식해서 동생을 많이 생각하지 못하고, 혼자 옆집으로 피신해서 저녁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동생을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무서워 다시 동생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저녁 때쯤 되니, 큰 오빠가 옆 마을에서 돌아왔다. 오빠가 지켜봤던 현장은 방공호에 있던 또 다른 아이는 부상당했는데 그 아이는 목이 말라 물을 먹었다. 출혈이 더 심해져 집으로 기어가던 도중 쓰러지고 나중에 죽었다. 시신을 나중에 보니.. 동물이 뒷꿈치를 먹었는지 없어진 채였다. 오빠가 현장에 죽었던 시신들을 모시고 나란히 갔다 놓았다. 오빠가 방공호에 들어가니 동생은 아직 살아있었다. 동생은 엄마가 죽었어 엄마가 죽었어를 반복했다.

 

오빠는 사탕이 있어, 동생에게 울지말라며 사탕건냈다. 동생은 부상이 심했어도 정신은 멀쩡했다. 그저 엄마가 죽었다는 말만 되뇌였다. 오빠는 부상당한 동생과 사촌동생을 마당에 데려왔다. 옆집에 있는 나를 데리고 다시 모였다.. 오빠는 방공호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수습하며 끔찍한 장면은.. 아까 알몸으로 들어왔던 이웃집 아주머니를 몸을 들었을 때 상반신만 있었다. 창자가 다 떨어졌다.

 

저하고 사촌동생하고 동생은 외삼촌이 병원에 갈 수 있게 도왔다. 오빠는 시신수습을 계속했다. 수습 후에 오빠는 시신을 제대로 묻지 못하고, 간단히 시체를 쌓아 땅에 묻었다. 수습 후오빠가 지켜보니 막내동생 눈이 너무 흐려져 있어. 오래못갈것같다고 생각했다. 친척들에게 이야기했다. 동생이 일이 벌어지면 알려달라. 묻어주겠다 이야기했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생이 너무 출혈이 심하고 오래 지속돼 죽은 거지. 더 일찍 도움을 받았으면,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르겠다.

 

(다낭항구에 독일의 진료배)

다낭 병원에 가서도 동생은 엄마 일어나요, 밥 지어줘요를 반복했다. 동생을 돌봐준 친 언니는 13살이었다. 근데 동생은 3일 동안 엄마를 부르다 죽었다. 죽은 다음 사람들이 동생의 시체를 어디에 보냈는지, 너무 어려서 지켜보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 언니는 사촌동생을 돌봐주고 있었고, 병원치료가 끝나도 나를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내가 너를 집으로 데려가 주겠다 말했다. 받아주던 사람이 생겨 너무 기뻤다. 아주머니가 다시오겠다는 며칠사이 오빠가 나를 찾아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김정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됐나?

 

: 비극이 일어나서 2000년도 쯤에 구수정 선생을 만났다. 만났을 때, 학살이 있은지, 반 세기가 지나.. 내 아픔이나 원망이 많이 가라앉았던 때. 다시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이들은 이후 세대다. 나의 가족을 죽였던 세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감정을 가지진 않았다.

 

김정우: 시민평화법정이야기를 듣게 됐을 때 한국에 오기까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날 오시던 때 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던때 너무 긴장해 탄 아주머니 손을 놓지 않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오게 됐는지. 법정에 참여하면서 어땠는지 듣고 싶다.

 

: 사실 제가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많이 무서웠고 걱정했다. 만약 한국에 들어가서 참전군인과 부딪히면 어떻게 대쳐해야하는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많이 긴장했다. 제가 가기전에 큰 오빠 동생들도 그렇고 이웃삶들도 그런 데를 왜가냐 너의 어머니 동생을 죽였던 사람들이 있는데 왜가냐. 자꾸 그런 질문을 던졌다. 오빠가 제일 많이 말렸다. 오빠가 말려도 왠지 제 마음속에서는 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희생자의 영혼들이 나를 한국에 데려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동안 구수정 이사가 마을로 와서 사람들에게 한국사회한국의 상황을 이야기, 설득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다 믿지 못해. 그래서 가서 그런 것들을 마을사람에게 들려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국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너무 떨렸다. 그 다음 한국시민단체들 학생들 우리에게 다가와서 안부를 전하고, 신경써주고, 관심을 가져주니 한국에 대한 원망 불안한 감정이 사라졌다.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 일주일동안 한국에서 보냈는데, 너무많은 관심, 사랑을 한국사람에게 받았기 때문에, 다시 인천공항에서 출국직전에 그런 감정이 확 들어와서 막 울었다. 참기 힘들어 통곡했다.

 

만약에 아직도 한국군에 대한 원망을 갖고 있다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 나의 가족을 죽였는데.. 그런데 따뜻한 한국사람들을 만나며 한국사회의 다른 시야를 갖게 돼고, 구분을 갖게 됨. 그러나 내 과거의 한국군 기억은..

 

제가 이번에 한국43평화상 하게 된 소식을 들었다. 얼마 안된 후에 가게 됐는데, 하미마을에 들어가 촬영하고 참배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엄마,숙모 동생에게 기도했다. 부디 나를 도와 달라. 한국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상을 잘 받을 수 있게끔 도와 달라했다.

 

기도하고, 영혼들에게 약속을 했다. 영혼들은 더 이상 아파하지말고, 과거에 있었던 아픔을 가라않게 하고 원망을 지웠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했다. 한국에 갔다오면 다녀와서 보고하겠다고, 한국에서 어떤 일을했는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미마을에 들어갈때마다 위령비에 참배하는데. 평소는 그냥 위령비를 참배하고 마음속으로 이야기하고 위령비를 떠나는데 떠날 때 온몸에 갑자기 찬기운이 돌았다. 슬픔이 너무 차가운 것. 촬영감독에게 말했다. 너무 이상하다고. 참배하면서 이런 느낌 든 적이 없다고. 모자를 쓰고 위령비를 떠났는데, 갑자기 너무 외로운거야. 외로움이 너무 들었다. 묘지 밑에 시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왜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 나도 쓸쓸한지.. 그런 느낌이 들어 눈물이 났다.

 

김정우: 질문 시간을 따로 드리고, 이번에는 뚜이옌 선생님도 2학년때 처음 진료단을 만났잖아요. 그 당시는 민간인 학살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는지? 그 때 선생님은 한없이 밝고 명랑했는데.

 

뚜이옌: 중부지방 출신이다. 어머니 사후에 외할머니 집은 1번 국도 바로 옆에 있다. 전쟁이 일상인곳. 매일매일 총소리 수류탄 소리 듣고 지냈던 동네. 외할머니 동네.. 미군도 맨날 왔다갔다하고 사탕 던져주면 어머니가 받아먹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씩 한국군이 들어오기도 해. 아버지의 고향도 그 근처. 나중에 호이안으로 이사해 자라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전쟁이야기를 종종 듣고 자람. 한국군인이 어떻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는지. 그런데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생각을 많이 안 해. 특별히 한국사람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기만하고 생각하지는 않아. 2004년도 처음 평연 진료단에 함께 가서 통역원으로 했다. 그때 쀵연에서 했다. 거기서 민간인 학살 생존자 아저씨를 만났다. 2015년도 퐁리탄 아주머니와 한국에 처음으로 가신분.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 제 주변에 있던 한국사람들이 한 두명씩 우는 모습을 봤다. 제가 좌담회가 끝날 무렵, 질문을 했다. 질문을 하면서 목이 메이고 울음바다가 됐다. 울던 한국 사람이 저에게 와서 달래주고 제가 기억하기에는 김정우 선생님도 많이 울어. 위령비를 찾았을 때 버스를타고 돌아가는데 많이 우셨다. 그때 나는 울지 않았다. 대신에 한국사람인데 왜 울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하여튼 어떤사람은 눈물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눈물로 계속 일을 하는 것 같아. 그 후20여년간 한국단체를 만나고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해 한국 시민단체를 만나고.. 문제의식이 조금씩 커지면서, 베트남사람으로서 내가 뭘 해야하는지 고민이 많았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는데 왜 우는지 모르겠다. 왜 이런 문제는 베트남에서 일어났고 피해자는 베트남사람인데 이문제를 해결하는 건 베트남이어야 하는데 왜 한국사람에게 의지를 해야하지? 베트남에 지식인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왜이렇게 내가 힘이 없지? 인맥이 왜이렇게 없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활동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시민단체에 의지해서. 그래서 2009년도에 들어와서 내가 뭘해야 할까 고민하다. 대학에 들어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는게 좋을 것 같다.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잇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수가 된 거죠. (내 당시 생각은)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김정우: 계속 이렇게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단체를 만나고 해온 걸로 알아. 법정내내 울먹이며 통역을 해서 울음바다로 만들어. 시민법정에 참여하고 보는 느낌은 어땠는지? 계속 해오면서 그땐 어땠는지?

 

뚜이옌: 시민법정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통역을 맡게 돼. 전 날까지 아주머니를 모시고 방문하고 하다보니 준비시간도 모자라. 법정 날 무대에 올랐는데, 아주머니 두 분보다 제가 더 긴장했을 것.. 법정 내용과 언어들도 너무 어려워.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려운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냥 듣는 사람으로서 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런 내용을 너무 얻엇을텐대. 어마어마한 지식을 얻게 될 수 잇는데. 통역을 하게 되면서.. 아마 아주머니들도 너무 힘드셨을 것. 사실 법정 시작전에도 아주머니들에게 법정내내 있을 필요도 없다. 피곤하면 그냥 들어가서 쉴수 있다. 가끔씩 물어본 것. 혹시 피곤한 것 아니냐? 모시고 방에 들어가서 쉬게요. 근데 아주머니는 두분 다 괜찮다. 끝ᄁᆞ지 여기 있겠다 해서 아주머니와 같이 있었고.

 

첫 날 끝나고 등이 너무 아파. 전까지는 이렇게 챙겨줬는데. 퐁리탄 아주머니가 체하면 등을 두드려주고 눌러주고, 그날은 반대로 아주머니들이 저를 챙겨주고 좋은 추억이었다.

 

김정우: 제주평화활동가교육 워크숍을 했는데, 뚜이옌을 봤다. 시민법정 발표를 한국 활동가에게 소개해. 다낭 외국어대 교수가 아닌, 평화 활동가가 되고 싶다고. 한국어를 가르치면서도 평화 활동가의 정체성을 가지겠다고. 통역단 친구들이 같이 하고 있고, 통역단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을 것 같다. 20년이 가는 진료단에게도 해주고 픈 말이 있을 것.

 

뚜이옌: 아마도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이문제를 가지고 활동해왔던 한국 활동가들도 그렇게 느꼈을 것. 우리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베트남 정부, 사람들은 왜 이 질문에 침묵할ᄁᆞ? 그런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베트남에 시민사회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열심히 하고 싶어도 인맥이 없어. 선생님들은 그런 이해를 해주시고, 계속하세요. 그리고 그러면서 저희와 함께 해주세요. 베트남 지식인과 함께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베트남 젊은 친구들에게 처음 시작했을 때 기대를 많이 했을 것. 좋은 한국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을 것. 그리고 이렇게 좋은 한국사람드로가 베트남을 위해서 좋은 일도 같이 하고 있다. 만약에 이선택을 계속 한다고 하면, 저처럼 울컥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베트남사회에서.. 문제를 이야기 할 때 가족이나, 친구들한테 반대를 받을 것. 계속가게 되면. 아마도 제 생각에는 시간이 지나면 많이 달라질 것. 내가 처음 참가했을때는 같이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계속 가면서 한국단체들도 많이 활동하게 됐고, 젊은 사람들도 접근하고 있고, 그러다보면 베트남 사회도 이 문제가 많이 알려질 거라 생각해. 아마도 대부분 한국어 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한국배우나, 가수가 좋아서 시작했을 것. 그런데 한국어를 배우게 되면, 한국사람들이 이런사람이 있다. 역사를 가지고.. 알아주면 좋을 것. 여기 있는 통역단 친구들은 다낭에서 공부하고 있잖아요, 올해 8월부터 복귀해서 다시 강의할 것. 이문제를 계속 갖고 갈 것.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같이 갈 것이다.

일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경험을 해서 트라우마 묘사도 할수 없을만큼 잔혹하고 끔찍한 기억들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정부차원에서 지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살이 일어난 다음해, 고아가 됐다. 한동안 고아원에서 지냈다. 그런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학살에 의해서 일어났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다. 작년부터 한국에 가게되고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친근한 사람도 있구나 그런생각이 들면서 그런 트라우마가 조금씩 가라앉아. 제가 바라는 것은 딱하나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사과했으면 좋겠다. 참전군인, 학살을 가했던 가해자가 나와서 사과했으면 좋겠다. 베트남 정부차원에서는 저와 같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아무 지원 정책이 없다. 지금까지.

 

뚜이옌: 베트남 관련에서 과거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녀 베트남에서 전쟁이 계속 이어져.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중국하고 싸웠고, 중국의 지배를 벗어난 다음 바로 식민지 시기 백년동안 프랑스시기가 됐고, 바로 미국하고 싸우게 됐고,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평생을 전쟁하고 살아. 전쟁 중에 태어나고, 돌아가신 분들. 부모님 세대는 청춘을 전쟁으로 보낸 세대. 내가 부모님 그 후대 세대. 부모님, 할머니,이런 이야기를 내가 하면 윗 세대는 지겨워할 것 듣고 싶지 않아할 것.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깊게, 인권문제다 하면. 지쳐할 것. 평생동안 전쟁하고 살아왔는데, 살았으면 다행이지 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냐? 그런 것을 느낀다. 학교에서는 민간인 학살 역사를 잘 다루지 않아. 한국군인이 미국 다음으로 제일 많이 파병한 나라인데. 교과서 초등학교 중등..역사교과서에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아. 고등학교에서 딱 한줄 300만명 보냈다. 그래서 젊은세대가 이 문제를 잘 몰라.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봤을 때, 한국, 베트남 사람과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너무 복잡해. 지금 남북한 문제를 스스로 풀어 낼 수 없듯. 베트남 문제도 여러요인이 엮어 쉽게 풀리지 않는 것. 지금ᄁᆞ지 베트남 정부도 공식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 전쟁에 대한 것을 잘몰라 관심을 얻는게 아니라.. 먹고 사는게 힘들어서.. 한국처럼.. 예전 일본에 사과하라 이런게 없었듯...이제 먹고 살기 시작하자 사과라하는 것. 베트남 사람들도 먹고 살기 좋아지면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다.

 

김정우: 또다른 질문이나 질의가 있으신지 내년이 돼야 볼 수 있을텐대.. 진료단은 20번째 왔다. 진료단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뚜이옌: 제가 오늘 여기 와서 알게됐다. 평연 여러분이 이끌어낸 평연이 올해 20주년으로 활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속으로 기뻤다. 한국 사람들이 이 문제를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도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거구나. 그래서 너무 기쁘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저희와 함께 같이 같으면 좋겠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힘이 많이 딸린 사람들이라. 여러분들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함께 같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우 만나는 자리가 굉장히 좋았다. 20주년인데 뭘해야하는데 고민했다. 우리 단장님께서 가는게 20주년 행사다.라고 강조한 바 있음. 어린이 진료를 345년을 처음 했지만. 진료팀들이 생존자 진료를 했으면 하는 고민돌 했음 있었음. 막상 해보니 어려운일이 아니라, 모시고 와서 진료를 하게되고, 병원에도 가게 되고 이러니까. 이렇게 시작하면 되는거고, 화수분을 만나면 되는구나 생각했거든요. 여러분게 같이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년에도 여기 언저리에 있겠구나 생각한다. 다음 내년에도 하미 탄아주머니를 만나면 스케일링하셔야죠. 간단히 와서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이걸 떠나서 우리가 인연이 돼서 발전하는게 우리가 가는 평화가, 평화의 복음이 아닐까. 내년에는 이는 붎편한거 없으셨느느지, 허리 불편한 건, 왼 무릎아픈건 어떠셨는지 여쭙기도 하고, 조기종선생님 보면서 아 만났지 하는 것처럼 다른 얼굴을 기억하고 또 편해지고 또 하실 말쓰므이 생기고.. 우리를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시내선생님께도 부탁드린다. 후배와 평연을 격려해주고. 이런 마음 이런 기억들을 가지면서 한해한해 쌓아가면, 다른 모습 다른 이야기를 한 걸음이 더 갔다. 43평화 특별상을 수상 하시는 것처럼... 처음 만났을때는 남산 식당에서 식사를 했었고 원아저씨 탄 아주머니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법정을 갔고 제주도를 같이 갔고 이번에 만났을때는 상을 수상하러 오시면 사람을 또 만나게 되겠죠. 인연들이 이어가는 걸음들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우리 뭐하는 건지 이게 맞나 헤매일때도 아주머니도 시내 선생님도 격려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성오 단장: 그때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하고, 원하시는 한국정부의 사과는 언젠가 이루어질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몇십년동안 쌓아왔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이 중요한대. 40년 동안 말못했던 긴 기간이 더 아팠을 것 같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쌓였던 응어리가 풀릴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응어리를 들으러 왔다. 기회 있을대마다 주저하지마시고 그때 일, 생각을 풀어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뚜이옌 교수님 2004년도에 처음 봤는데, 이렇게 통역을 대동하고 오신걸 보면 기쁘고, 중요한 것은 함께해주셔서 고맙다. 계속 함께해주셨으면 좋겠고, 많이 먹고 살찌셨으면 좋겠다.

 

뚜이옌: 열심히 다른 젊은이들을 꼬시겠습니다.

 

: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여러분들이 같이 평화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한국정부의 공식적 사과를 받을때까지 함께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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